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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1,463회 작성일 22-09-0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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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2341661.2405QRagGLdsaC4.jpg영암출생, 홍익대학교 졸업, 중국 루쉰미술대학 목판화 연구원/ 객원교수, 중국 루쉰 미술대학 명예 부교수, 한국 목판문화원 원장, 커뮤니티 아트 목판대학 원장, 우석대 객원교수,

개인전 : 그로리치 화랑(서울), 그림마당 민(서울)/경북대전시관(대구), 그림마당 민(서울)/온다라미술관(전주), 갤러리 누보(부산), 나무화랑(서울), 무심 갤러리(청주)/ 갤러리 누보(부산), 현화랑(서울), 나까지마 갤러리(일본, 동경)/노신 미술대학 미술관(중국, 심양), 이십일세기 화랑(서울)/동원화랑(대구), 이십일세기 화랑(서울), L.A. 컨벤션센터(미국, 98코리아 엑스포)/도올 갤러리(서울), 갤러리 ART SIDE(서울)/ 얼 활항(전주), 현대 백화점 갤러리(부산), 충북 아트페어 특별전(청주예술의전당), 제주현대미술관(제주)/ 팔레 드 서울, 푸른산 빛 깨치고(나무아트, 서울) 산의 노래(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서울) 외 다수

주요단체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아랍미술관), 80년대 민족미술 대표자가품전, 한국 민중민중판화전(일본, 오사카), 한국민중판화전(뉴욕), 민중미술 15년 전(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민중미술 15년 전(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국 민족미술연합 창립 전(미술회관, 서울) 외 다수

주요작품소장처: 국리비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 서립시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대한민국 국회, 진천생거판화미술관, 상명대박물관, 현대중공업, 충북도청, 중국미술관(중국, 북경)

저서: 김준권-나무에 새긴 30년(화집, 2014), 광화문미술행동-100일간의 기록(김준권.김진하,2017)



지나가는 세월의 속도에 뭐든지 시큰둥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에 비례해서 기억이란 창고에 저장해 놓은 데이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에 반비례 하듯 삶에 대한 호기심 양이 줄어든 인생은 뭔가 뻔하고 따분하다. 나이 든 화가들 상당수는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작업 적재적소에 적당하게 힘을 줬다가 뺄 정도의 능숙해진 기량과 양식으로 세련되어진 화면만큼, 대충 현실에 순응하고 세상에 자신을 맞추며 그림도 팔고 사람 관계도 능숙하게 만드는 걸 볼 수 있다. 기성세대가 된 것. 그런 모습들을 보는 나는 재미 없지만, 어쩌겠는가, 몸에서 근육과 함께 빠져나간 열정과 도전적 시선이 저절로 다시 와서 뼈에 붙는 게 아닐 터이니.

그래서 이런 중장년이나 노년층들은 화양연화 시절을 그리워하며 “라떼는…”이라는 회고와, “젊음이 부럽다”는 별반 신선하지 못한 소위 ‘꼰대식’ 수사를 자주 구사하는 모양이다. 다만 최근의 청년문화 트렌드가 586세대의 자기모순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바탕으로 한 것을 깨달은, 비교적 눈치 빠른 감수성을 장착한 이 나이대의 사람들은 적당한 선에서 스스로를 제어하며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의 전체성에서 벗어날 정도는 되는 듯싶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런 나이에도 뜨겁게 청년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관통해온 작가 중 상당수는, 변화하는 시대의 여러 문화적 양상을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식 전망과 도전 의식을 갖고 있다. 2020년대 동시대적 지향성과 실천으로 현실을,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업 양식과 스타일은 젊은 세대와 다르겠지만, 특유의 직진성과 모색과 변화를 통해서 세계에 대해 초지일관 성찰하고 실천하는 작업행위로 자기가 작가임을 증명해낸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청년 작가 아닌가, 여전한 청춘 말이다.

김준권은 그런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1980년대 미술운동(서울미술공동체, 민족미술협의회), 교육운동(전교조 미술교사운동)과 문화운동(민족예술인 총연합회)판을 거친, 백기완 선생님의 표현대로 보자면, 문화 운동판의 일꾼, 즉 ’새뚝이’다. 전거한 여러 미술·문화운동단체의 주요한 실무를 맡으며 반독재 투쟁·장르를 넘나드는 문화적 기획과 연대와 더불어 작가 활동도 적극적이었던 실천가였다. 한마디로 바쁜 청년기를 보낸 셈이다. 작가로 보자면 80년대 초중반엔 회화를 주 장르로 활동했으나, 1985년부터 당시 동시대적 소통성과가 두드러졌던 판화 운동에 투신하며 문예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40여 년을 이어져 온다. 그의 근래 사회적 활동과 근작을 보면 여전히 그가 ‘청년 작가’임은 분명해 보인다.

1980년대 김준권의 작업 양상을 보면 초기 회화작업 이후, 중반기인 1985년부터는 고무판화와 목판화로 분단 현실의 반영·통일 염원·소외된 이웃의 삶의 현장·교사 시절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과의 일상 등을 작업에 옮겼다. 목판화 초기 작업이라 거칠고 둔탁했지만 정직한 시선과 열망으로 당대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스트의 입장이 선명한 작업이었다. 1985년의 <태극도>와 <나는 밥이다>를 시작으로 <하늘과 땅(태극도), 1986>, <북소리, 1987>를 거쳐 80년대 김준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새야 새야, 1987>, <통일 대원도, 1987>, <학교에서, 1988>연작, <백두산 함께 올라가리라,1989> 등을 제작했다.
이 시기 김준권 판각법을 보면, 대상의 형태를 외곽선인 구륵(鉤勒)으로 양식화해서 재현해내는 전통적 고판화의 선각(線刻)방식을 따랐다. 이는 당시 전통 양식과 민중적 미감의 현대적 차용이라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민중미술의 미학적 입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오윤의 괄목할만한 목판화가 하나의 표지로 작동해서 그런 것으로도 여겨지지만, 그보다는 대중들과 나누기 쉬운 미적 형식과 소통법에 적합한 전통적 양식이라 그 형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선시대 서책본의 전통 목판삽화 양식을 미술교육 운동의 일환으로 미술 수업에도 적극 활용하고, 엽서·노트·책받침·전단지·팜프렛·카렌다 등 다양한 생필품으로 대량 복제해서 학생들이나 시민들과 소통하고자 운동했던 점에서, 그가 선택한 이 조형 방식의 의도성이 반증 된다. 실제로 전교조에서 미술교사운동에 매진하다가 1989년 강제해직까지 당한 김준권이고 보면, 목판화를 통해 작업과 미술교육을 하나로 결합하려는 매체 확산의 문예 운동과 작가적 실천의 통일이 목판화였던 건 분명하다.

교사 해직 이후인 1990년부터 김준권은 미술운동 단체인 민미협과 민예총의 조직운동을 거치며 본격적인 미술운동가이자 판화가의 길로 나섰다. 1988년 ‘그림마당 민’에서 그간의 저항적 단색유성목판화들로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진천에 정착한 1992년부터는 질긴 민중적 생명력에 근거하되 좀 더 따뜻한 서정적 감성의 다색유성목판화에 매진하게 된다. 목판화 형식의 변화가 시작된 것. 80년대식 선각 판화로부터 프린팅의 비중이 높아지는 다색의 면(面)판화로의 실험과 모색과 이행이다. 이는 작가로서는 당연한 변신이자 태도다. 김준권 개별적인 조형적 감수성의 필요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87년 6월 혁명 이후 사회와 문화 환경의 변화를 목판화도 수용해야 하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좀 더 대중의 일상과 함께하는 목판화를 지향하면서도, 넉넉한 민중적 감성을 체현하는 넉넉함을 작업에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교사로 복직해서 부임한 진천이란 곳의 지역적 현장성이 발현되는 내용이 자연스레 국토풍경이나 민들레와 같은 질긴 생명력을 투사하는 소재로 연결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기도 하고. 다색판화는 그런 작업 내용의 변화를 자연스레 수렴하고, 동시에 새로운 모색을 펼치기에 적당한 형식이었다.
따라서 90년대 김준권은 <엉겅퀴, 1991>연작, <붉은 산, 1991>, 지리산 풍경, <마을길, 1992>, <갈아엎는 땅, 1993>, <섬마을, 1993>, <터, 1994>, <태백에서, 1996>, <조팝나무 마을, 1998>, <동강>연작, <겨울 숲에서, 2003>, <청보리밭에서, 2005> 등에 이르기까지, 이웃의 삶의 터인 국토 현장을 누비면서 강인한 민중적 정서를 형상화해낸다. 민중인 일반 서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따뜻한 소통을 이루는 목판화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제작한 정감 어리고 부드러운 다색목판화는 당시 개인전에서 많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색 민중미술목판화의 대중성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는 긍정적인 결과였다. 이러한 대중적 기표의 이미지는 2007년 인사아트센터 개인전의 수묵 목판화 <산에서> 연작의 등장 이전까지 김준권 목판화의 90년대식 표지라 하겠다.

이 시기 김준권의 국토풍경은 ‘관찰’과 ‘실경’이라는 자연주의적 시선에 기초했다. 그러나 그 형상은 단순한 객관적 관찰의 자연주의적 시선에 더해서 아릿하게 아픈 이웃의 한과 따스한 생명력을 품에 안은 조선적·한국적인 정서를 포함한 심성의 기호이기도 했다. 토속성·현장성·서정성·계급성 등을 아우른 따뜻함과, 이웃의 가난과 아픔의 을씨년스러움이 직조된 이 담백한 아름다움은 소박하게 꾸밈이 없다는 점에서는 자연주의적이었지만, 짙은 서정과 정서를 동반하며 먹먹한 감정을 소환해낸 점에서는 일정 정도 표현적·상징적 요소들을 동반한 것이기도 했다.

90년대 김준권의 작업 소재가 풍경으로 바뀌었더라도, 끈질긴 민중적 삶을 반영하는 80년대 작업 태도와 미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80~90년대 ‘현실’과 ‘민중’이라는 리얼리즘적 시선·목판화의 전통형식·민중정서·표현적 양식성을 두루 작업으로 통일하려는 나름의 실험과 모색의 태도가 그 바탕에 있어서다. 뭐랄까, 김준권 자기만의 목판화에 대한 미학적·형식적 욕심과 의욕이 냄새로 드러난 것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런 그의 목판화에의 도전은 한국의 전통/현대목판화의 고찰과 함께 일본과 중국의 목판화도 아우르며, 동북아 3국 목판화에 대한 통시적 연구를 적극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 불혹을 눈앞에 둔 늦은 나이에 중국 심양 노신미술학교로의 유학은 바로 그런 김준권의 기질과, 목판화에 자신의 인생을 걸겠다는 의지의 실현인 셈이었다.

여담이지만, 그 바탕에는 90년대 초반 몇 번의 전시와 성공적인 작품판매를 통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든 그의 자신감도 있었다. 1992년 그림마당 민-전주 온다라갤러리-부산 누보갤러리, 그리고 1993년 서울 나무화랑에 이어, 특히 1994년 현화랑 개인전의 전 작품 솔드아웃이라는 상업적 가능성에의 경험은 그의 단단한 자산이었다. 목판화로도 시장에서의 성공은 가능하다는 자신감 말이다. 김준권의 도발(?)인 유학은 바로 이때 상업적 성공에 머물지 않음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김준권은 그런 승부사적 기질이 있다. 근래 필자가 ‘광화문미술행동’, ‘목판대학’ 등 여러 운동적 측면의 기획과 사업을 함께하면서 본 김준권은, 빈틈없는 판단력과 그에 근거한 빠른 실행력, 그리고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 스케일 있게 밀어붙이는 뚝심이 대단했다. 바로 그의 이런 기질이 불혹이 된 집안의 가장이 외국 유학을 밀어붙이는 ‘위험한 모험(?)’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었으리라. 그것도 화려하게 각광을 받는 서구 현대미술이 아니라 비인기종목(?)에 해당하는 목판화란 장르로 말이다.

아무튼, 김준권의 이 도발적 도전은 이후 2000년대 한국현대목판화의 발흥에 일조하는 주요한 단서이기도 하다. 유학에 앞서 해인사에서의 한국 전통 목판화 학습과, 일본 판화 전문공방에서 수성 목판화를 경험한 뒤 중국 노신미술대학에서 수인목판화를 익히면서 이들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김준권 특유의 수묵 목판화를 개척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검은 단색조 색면을 통해서 나무판의 질감이 생생하게 수묵으로 한지에 전달되는 수성 면(面)판화의 한 미적 경지가 열린 것이 그것이다. 이 바탕에서 다시 동양화 물감을 활용한 다색의 채묵목판화까지 확장하며 김준권의 목판화는 기법뿐만 아니라 미적 수준에 있어서도 한국현대목판화에서 독자적인 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물론 현재 관조적인 수묵목판화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김준권의 리얼리즘적 유성 다색목판화도 만만치 않은 경지다. 그러나 역시 그보다는 수성의 수묵·채묵목판화를 통한 전통/현대, 전문성/대중성을 아우르며 작가 내면이 문인화적 미감으로 발현되는 수(채)묵의 형상성은, 김준권만의 미적 세계와 형식을 견인해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영역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바로 이 2000년대 수묵 목판화와 유성목판화 모두는, 역시 90년대 시절 다색목판화의 형식과 80년대 민중목판화의 내용적 문제의식의 연장 선상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목판화작업을 통한 현실적 리얼리티의 추구와, 그 결과물인 작품을 통한 소통의 사회화를 이루려는 작가적 의식이 지난 40년을 관통하는 김준권의 초지일관한 작업 근간이 되어 왔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1980년대 민중미술 목판화의 판각을 통한 칼의 운행과, 90년대 이후 국토를 담아내던 다색면판의 프린팅은 결국 2000년대 김준권 수묵 목판화의 뼈와 근육이 된 셈이라 하겠다. 거기에 미술을 통한 문화운동의 생리가 김준권 특유의 체질과 조응하며 비판적인 미의식을 거듭 발현하는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김준권은 2000년대 근작을 통해 80~90년대 자신의 목판화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증명해냈다. 만약에 2000년대 수묵 목판화의 성취가 없었다면, 80~90년대 목판화는 그냥, 거기에서, 그렇게 민중미술사의 어느 한 부분으로 평범하게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00년대 목판화의 미학적·형식적 성취로 인해 80~90년대 구작들도 이젠 그 시대를 증언하는 미적 성취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결국 자기 행위의 결과로 자기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이고, 미술은 결국 그 존재론적 실천의 결과이다. 칼의 운행과 운동의 생리를 작업으로 통일 시킨 김준권의 태도가 바로 오늘의 김준권이란 작가가 있게 만든 뿌리이고…. 민중미술 시절 단색 선각 목판화의 “칼의 노래”도, 9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는 유성과 수성을 아우르는 다색 면 판화의 “판의 노래”도 모두 역사와 당대를 작품으로 참여하고 증언하려는 미적 태도와 작가적 실천에 기반한 “삶의 노래”로 초지일관 해온 점은 자명하다. 그게 김준권 목판화의 힘이다. 그래선가 지난 80~90년대 김준권의 투박하고도 꾸미지 않은 목판화는, 지금 다시 보아도 새롭고도 생생하다. 살아있다.


출처: 김준권의 판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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