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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806회 작성일 22-09-02 15:09본문
대한민국의 가수. 1955년 6월 28일생.1962년 2월 만 6세로 당대의 가수들도 발표하기 어려웠던 10인치 LP 스튜디오 앨범인 당년 7세 소녀가수 앨범으로 데뷔해 2022년 현재 데뷔 60주년을 맞이한 전설적인 대가수.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다. 개요에서 소개되었듯 1962년 7세로 데뷔하고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1971년 발표한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나이야 가라' 등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다. 학업은 계속해서 병행하고 있는 모양이며 2019년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2018년 발표)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
그 뒤 1977년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인근에서의 대규모 폭발사고로 인해 극장이 무너져내려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고.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81년에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다.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으로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 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다.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9]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나이야 가라' 등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다. 학업은 계속해서 병행하고 있는 모양이며 2019년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2018년 발표)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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