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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450회 작성일 23-03-1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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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金炳昊)(1910~1968) 영암출생,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금암(錦巖).

일제강점기 김창조의 제자로 조선창극단, 임방울창극단에서 활동한 가야금산조의 명창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기봉은 대금에 능하였으며, 어머니 박연례는 소리에 능하였다. 또한 집안이 무속에 종사하는 까닭에 김병호의 작은아버지인 김보배도 피리에 능하였다. 김병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일찍이 가야금에 입문하였다. 호가 금암인 것은 그가 태어난 집 뒤에 태산봉[현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봉호리로 해발 83m의 낮은 구릉]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의 정기를 이어 받으라는 뜻에서 금바우[바위]라 불린 데서 연유하였다.


6세가 되던 해인 1915년경 한학을 배우던 유년 시절부터 동향인 김창조(金昌祖)[가야금 산조 창시자]에게 가야금을 배웠으며, 17세가 된 1926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에 직속 극단 창극좌가 설치되었을 때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는 1933년 5월 10일 여성 명창 김초향(金礎香)의 제안으로 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한성준(韓成俊) 등 판소리 명창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된 단체로서 사무실은 김종익의 후원으로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에 마련되었다. 참가 인원은 총 130여 명이었다. 음악적 역량이 높은 사람들로 조직된 이 단체의 여러 명인들 속에서 김병호는 지대한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

1939년 조선창극단의 단원으로 임방울(林芳蔚)과 함께 국내외 순회공연을 하였으며, 1942년에는 부산 동래권번의 교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1954년에는 여성국극동지회[임춘앵단체 혹은 여성국극동지사로 불리기도 함]의 악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김병호의 활동 무대는 창극단과 동래권번이었다. 창극단은 가·무·악을 종합하는 형태의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여러 명인으로부터 다양한 종합적인 음악적 영향을 받아 음악적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김병호는 「가야금 산조」뿐 아니라 「판소리」, 아쟁 산조, 「가야금 병창」, 단소 연주도 능하였다. 이에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살려 섬세하고 변화가 다양한 가락에 독특한 엇모리장단을 짜 넣음으로써, 이른바 「김병호류 가야금 산조」를 완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는 서울·경기의 대표적 가락인 경드름, 부산 지역의 대표적 가락인 메나리, 김병호가 태어났던 전라도 지역의 남도 계면조와 무속 음악 등이 영향을 미쳤다.

1959년 인천여자고등학교 고전 음악 강사로 후학을 지도하기 시작하였으며, 1961년 국립국악원 악사 및 국악사양성소·서울대학교 가야금 강사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현재 알려진 제자로는 강문득(姜文得)·양연섭·김정숙 등이 있다. 김병호는 1968년 8월 27일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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