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달사(梁達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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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2,739회 작성일 22-05-31 13:54본문
양달사(梁達泗, 1518~1555)
사람 됨됨이가 불의를 보면 참지못하고, 완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무과에 급제했다. 현감(縣監) 자리에 있을 때, 부모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정(嘉定) 을묘년(1555, 명종 10)에 왜구(倭寇)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여러 고을이패배하여 달아나자 왜적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양달사는 ‘하북(河北) 지역에 의로운 선비가 없다’는 고사에 가슴아파하며, “상복을 입고 있는 몸으로 싸움터에 나가는 것이 비록 효도의 예는 아니지만 왜적 때문에 임금을 돌보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드디어 장정(壯丁)을 모집하여 계책을 일러 주었다. 또 화랑이를 모아서 화려한 빛깔의 무늬가 있는 옷을 잘 차려입고 다 같이 온갖 연극을 펼쳐 보이게 했다. 왜적들은 그 장면을 보고 즐거워하며, 모두 가까이 가서 구경하였다. 양달사는 그 왜적들이 아무런 대비를 갖추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래 알아보고서, 무리를 이끌고 분발하여 왜적을 습격하였다. 화랑이들 역시 양달사 무리를 도와서 적을 공결했으며, 성 안에서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뒤따랐다. 5,6만에 달하는 왜적의 무리들이 거의 다 무참한 죽임을 당하였다. 왜적으 무리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힘을 모아 양달사의 뒤를 추격했다. 양달사는 거짓으로 패배한 척 하면서 달아나, 적들을 물 없는 진흙탕으로 유인했다. 과연 왜적들이 그곳까지 뒤쫓아왔다가 모조리 진흙탕 속에 빠졌다, 양달사는 적의 목을 남김없이 베어 버렸다. 이로써 남쪽 지방은 평안하게 되었다. 양달사는 적의 목을 남김없이 베어 버렸다. 이로써 남쪽 지방은 평안하게 되었다. 양달사는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으로서 대궐에 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모든 공을 원수(元帥)에게 돌린다음, 다시 삼년 상을 치를 여막(廬幕)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쳤으니, 지금까지도 애달파하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하북 지역에~없다’는 고사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록산(安綠山)이 반란을 일으키니, 하북의 군현(郡縣)들이 모두 일시에 항복했으므로 현종이, “하북 24군(郡)에 의로운 선비가 한 사람도 없는가?”라고 탄식했다는 고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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