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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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1,757회 작성일 23-02-0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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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일대에서 노동 운동을 전개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창희(李昌熙)[1911~1959]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본적은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望湖里)이다. 일제 강점기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여수 적색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옥고를 치렀다. 활동 당시 이창의(李昌儀), 강만수(姜萬洙), 강재동(姜才童)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활동 사항] 이창희는 1928년 3월에 영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도립 사범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5월 1일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1931년 7월까지 사립 학원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영암 농민 조합·여수 적색노동조합의 결성에 참여하는 등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11월 6일에 영암 농민 조합 창립 준비회 규약의 인쇄에 협력하다가 체포되어 1932년 2월 29일에 광주 지방 법원 장흥 지청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 20원을 언도받았다. 1932년 6월에 이창희는 동지들과 함께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 들어가 산업별 적색 노동조합을 조직하기로 협의하고, 7월에 여수 적색 노동조합을 결성한 뒤 정미 노동부(精米勞動部)를 맡았다. 1933년 7월부터 7개월 동안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와 여수 경찰서가 합동으로 조선 공산당 재건 전남 연맹과 여수 적색 노동조합 관련자 80여 명을 검거하였는데, 이때 이창희를 포함해 검거된 여수 적색 노동조합 관련 인원은 20여 명이었다. 이창희는 1936년 6월 29일 광주 지방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창희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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