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호(玄俊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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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1,839회 작성일 23-02-0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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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친일 금융인이자 기업인. 

현준호(玄俊鎬)[1889~1950]는 영암군 학산면 침계리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호남 은행을 설립한 금융인이자 일제 강점기 식민 통치에 협력한 기업인이다.

[가계]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무송(撫松)이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영암의 부호 현기봉(玄基奉)이다.

[활동 사항] 현준호는 17세 때 담양 창평(昌平)의 영 학숙(英學塾)에서 수학하였고, 휘문 의숙(徽文義塾)을 거쳐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률학과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창평 영 학숙에서 만났던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과 지속적으로 교유하였고, 1917년 귀국해서는 민족 은행인 호남 은행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현준호는 1920년 8월 호남 은행을 설립하여 전무 취체역에 선임되었고, 1925년에는 호남 은행의 대표가 되었다. 또한 1926년에 조선 생명 보험 주식회사 감사 및 취체역·동아 고무 주주·영암 운수 취체역을 역임했으며, 1939년 2월에는 서호 간척 사업을 계획하고 측량 조사를 시작하였다. 1940년에 경성 방직 공업 주식회사 취체역을 거쳐 전남 산업(全南産業)을 설립하였고, 1942년 5월 호남 은행이 동일 은행에 양도되자 이후 서호 간척 사업에 몰두하였다. 현준호는 교육 사업에도 특별한 관심을 두어 1921년 1월 보성 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감사가 되었고, 전남 육영회를 발족하여 이사장을 맡았다. 1927년 5월에는 광주 공립 여자 고등 보통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설립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24년 전라남도 평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1930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일제의 식민 통치에 밀착한 기업가의 행보를 보였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 공로자 명감』에 아버지 현기봉과 함께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현준호는 중일 전쟁 발발 후 총독부가 조직한 시국 강연반에 참여하여 전남 지역을 돌면서 전쟁 지원을 역설하였으며, 1938년 조선 총독부 산하에 설치된 시국 대책 조사 위원회에도 조사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에는 흥아 보국단 준비 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참가했고, 중추원 고문과 참의들이 결성한 시국 강연반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가담하며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49년 현준호는 친일 혐의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 출두하였으나, 호남 은행을 독립적으로 운영한 점 등이 인정되어 불구속 처리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 후 혼란의 와중이던 1950년 9월 28일 광주 형무소 농장에서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묘소] 현준호의 묘소는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 선산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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