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작성자 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1,575회 작성일 22-02-28 15:09

본문

구정봉과 신령암 (영암읍, 군서면)

월출산은 해발 808.7m 로서 영암(靈岩)군과 강진(康津)군계(郡界)에 있는 소금강(小金剛)이다.
백제(百濟) 때 월내산(月來山)이라 했다고 하나 신라통일(新羅統一) 이후 월출(月出) 또는 월생산(月生山)이 됐다.(사실은 '달내뫼'의 한자표기다.)

이 이름은 구림(鳩林)에서 보면 달이 마치 이 산에서 생겨나 떠오르듯 보이기 때문이었다 한다. 전남 평야(全南平野)를 가로질러 천산만봉(天山萬峰)을 이룬 이 산의 최고봉은 천황봉(天皇峰)이고 그 아래 서북쪽 738고지(高地)를 이룬 구정봉(九井峰)이 있다. 이 구정봉은 30m 이상의 암반으로 이뤄졌다. 그 넓이는 장정 50여 명이 앉을 수 있다. 직경 2∼3m 안팎의 웅덩이가 패여 물이 항상 괴어 있다. 이 웅덩이를 일러 정(井)이라 하고 이 정상의 암반을 신령암(神靈岩)이라고도 하며 삼동석(三動石) 이라고도 한다.

이 우물은 옛날 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생긴 것이라 전해온다. 동차진은 구림(鳩林)에 유배되어 내려와 살던 어느 장군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동차진은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깃털을 달고 왔으며 백일이 되자 이가 났다. 세 살이 되자 맷돌을 번쩍들어 올렸다. 일곱 살 나던 해 어른들처럼 나뭇짐을 지고 다녀 '구림에서 장사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평범한 자식으로 기르고 싶었는데 어느 날 그의 집에 들른 노인의 말에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사람이란 자고로 때를 만나야 하고 사람을 만나 기량을 닦지 못하면 비운에 빠지게 되는 것이오"라며 아들을 자기에게 맡기라 이르는 것이었다.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자식이 비뚤어진다는 말에 놀란 노모(老母)는 동차진을 노인에게 맡겼다. 동차진은 괴 노인을 따라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10년 동안 도술을 익혔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동차진은 그의 노모를 찾아 집에 왔다. 동차진의 어머니는 자식의 능력을 실험하기 위해 자식에게 내기를 걸었다. "차진아, 그 동안 쌓은 네 능력을 보고 싶구나, 내가 밥을 지을 동안 너는 저 산봉우리에 올라 석성(石城)을 쌓아라.". 이 시합에서 노모가 이기자 차진이 억울해 하며 돌을 내던지고 깨뜨렸다. 이를 본 동차진의 어머니는 아들을 타일렀다. "듣거라, 항시 자만과 만용이 사람을 망치는 법이란다.". 이 무렵 북쪽 오랑캐들이 국경을 넘어 침공해 왔다. 이를 전해 들은 노모는 아들의 도술을 쓸 곳이 생겼다고 기뻐 나가 싸우도록 일렀다. "그까짓 오랑캐쯤은 내가 직접 나가지 않고도 섬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께 이르고 구정봉(九井峰)에 올라간 동차진은 한 동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략질하던 오랑캐들의 머리 위에 돌멩이가 수없이 쏟아져 몰살되었다. 이때 하늘에서 뇌성이 울리며 옥황상제의 노기 서린 외침이 울려왔다. "네 이 놈 동차진아! 네가 익힌 도술은 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쓰라는 것이었지, 오만 방자하게 쓰라는 것이 아니다. 네 놈의 하는 행실을 보아하니 인간을 규도 하는데 도술을 쓰기보다 네 공명심을 채우거나 만용을 부리는데 써 화를 부를 것인즉 살려둘 수 없다.". 벼락이 내려 아홉 번째에 때려 죽여버렸다.

이처럼 비참하게 죽고 만 동차진은 사람들이 이 봉(峰)에 올라올 때마다 세 번을 움직여 다시는 자신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응징하였으며 그 때문에 신령암(神靈岩) 삼동암(三動岩)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삼동석이 구정봉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월출산(月出山)에는 열 사람이 움직이나 한 사람이 움직이나 그 흔들림이 똑같은 동석(動石) 세 개가 있어 이를 이르는 것이라 한다.
그 바위를 확실히 지적하지는 못하지만 영암(靈巖)이란 지명(地名)도 이 삼동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