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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590회 작성일 22-04-18 17:00본문
신석기시재는 인류가 수렵과 채집으로 대표되는 저급한 자연경제 상태에 놓여 있던 구석기시대와 달리 생산경제 단계로서 새로이 토기를 발명하고 농사짓기와 가축치기가 시작되고 간석기가 사용되어 인류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점에서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하천을 중심으로 밀집된 분포를 보여주고 있으며 기원전(B.C)6천년경에서 청동기가 시작되는 기원전 1천년경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큰 강이나 바닷가에서 동굴을 이용하거나 땅을 파고 만든 움집을 짓고 무리를 지어 살면서 어로와 사냥으로 생활하다가 후기에 와서는 원시적인 농경생활도 하였다.
그들의 주거형태는 구석기시대와 같이 바위그늘이나 동굴을 이용하여 바닥에 돌을 깔아 사용한 예도 있지만 움집을 만들어 생활하였다. 움집은 평면이 원형 또는 모가 죽은 방형이었다가 차츰 방형으로 바뀌었으며 면적도 15평방미터 정도이고 기둥자리의 배치로 보아 기둥위에 도리를 받친 원추형 움집이었다가 기둥이 없거나 벽에 평행하게 2 ~ 4줄을 배치한 맞배우진각 지붕을 한 움집에서 살았다. 주거생활도 화덕자리가 처음에는 중앙에 있다가 기둥쪽이나 한쪽으로 약간 치우쳐 위치하고 있어 주거공간 기능의 분화를 가져왔다. 신석기인들은 강가와 가까운 곳에 살면서 고기잡이에 생활을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으며, 해안변에 형성된 거대한 조개더미로 볼 때도 그러하다. 집터에서나 조개무지에서 어로와 관련된 도구의 다량 출토 그리고 집승이나 물고기뼈, 각종 조개류 등과 조합식 낚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어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어로생활과 함께 사냥도 하였는데, 사슴, 멧돼지 등과 강치, 고래, 바다사자등 바다 포유동물류 등이 주 대상이었다. 그리고 굴, 전복, 소라, 우렁이 등 조개류도 먹기 시작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어로생활과 수렵채집 사회였으나 황해도 지탑리유적에서 조와 피로 보이는 탄화된 곡물과 함께 돌보습, 낫, 갈판 등이 발견되어 농경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남한에서는 신석기시대 중기에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벼농사는 신석기 후기나 청동기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사람을 매장하는 매장풍습이 있었다.
그 당시의 유물로는 다양한 무늬와 형태를 보이는 토기류와 돌도끼, 돌팽이, 돌칼, 갈판, 갈돌, 낚시, 그물추, 화살촉, 가락바퀴, 장신구 등 석제와 토제 및 뼈로 만든 제품들이 있다. 이들 유물은 수렵, 어로용구, 농경구, 조리용구, 생활용구 등의 용도별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융기문토기, 빗살무늬토기 등의 사용은 음식물의 조리 및 저장수단으로써 신석기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이다.
전남지방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신석기시대 유적은 바닷가나 인근도서에 위치한 조개무지유적과 내륙지방의 보성강변, 영산강변 등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수적으로는 많지 않다.
조개무지 유적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신안 대흑산도, 소흑산도(가거도), 하태도, 우이도, 육지의 인근섬인 완도 고금도, 신안 지도. 어의도, 여천 돌산 송도, 해안가인 해남 백포리 두모, 광양 오사리 돈탁 등이 있으며 내륙인 보성강변의 충적지대인 승주 대곡리, 보성 죽산리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영산강 중류지역인 나주 다시면 가흥이레서는 기원전 1,500년경으로 추정되는 벼화분이 검출되어 이미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아직까지는 영산강 유역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영암에서 가까운 나주 가흥리의 벼화분 검출지로 보아 신석기시대 유적은 영암 등지에서도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 :https://museum.gwnu.ac.kr/museum/25843/subview.do
사진출처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37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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