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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607회 작성일 22-04-19 17:20본문
1. 백제시대의 전남
백제는 삼국시대에 철기문화가 확산되고 일부 마한으로 표상되는 세력에 대표되던 한강유역 고구려의 국가경험을 대유한 유이민 세력을 중심으로 한 온조에 의하여 B.C. 18년에 건국되어 A.D.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대삼국 가운데 한 나라이다.
백제가 마한을 정벌한 시기는 근초고왕 24년(A.D. 369년)으로 보고 있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제의 마한 정벌은 마한의 중심지역 즉, 전북.충남지역의 복속을 의미하며 전남지역 그 중에서도 영산강 유역의 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 고고학적인 자료로 증명하면 영상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이 지역의 강한 토착세력의 무덤인 대형옹관묘가 그것이다. 적어도 백제의 석실분이 사용되기 전의 5세기 경까지는 이 지역을 백제는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였다고 보여진다.
한편,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한 후 남방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특히 동성왕대에 이르러 본격화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전남지역도 비로소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구조하에 들어가고 있다.
즉, 동성왕때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군대를 보내어 정복한 사실이 있는데, 이때 전남지역은 이미 상당히 평정되어 있었을 것이며, 특히 무령왕때 전남의 상치리, 하치리, 사타 등 4현을 점령하였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마지막까지 백제에 저항하던 세력이 제압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무렵에 영산강 유역인 나주 반남면과 해남 월송리 등에 서울 등지에서 조영되던 횡혈식 석실분 등이 나타나고 있음은 우연의 일이 아니다.
전남지역이 이처럼 완전히 백제에게 복속되면서 백제의 통치구조가 정비되어 갔다.
백제의 중앙관제로 16등제와 6좌병제, 22부제, 수도 조직으로서 5부제가 있었다. 지방조직으로는 근초고왕때 중국 군현과 같은 기능을 하는 담로제가 있었다. "양서"에 보이는 22담로는 한강유역 상실 후 축소된 지역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이때 전남지역에 담로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전남지역이 백제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동성왕 이후부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담로가 설치되었다면 이 이후에 일이다.
그런데 담로체제는 사비 천도후 방일군일현체제로 정비되어 갔다. 즉 5방 38군 200현(성)으로서의 정비였다. 이때 지배체제의 핵심은 5방이었다. 5방은 중방-고사성(고부), 동방-득안성, 남방-구지하성(장성), 서방-도선성, 북방-웅진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5방의 위치인데, 중방인 고사성이 오늘날의 고부에 위치해 있는 것은 5방이 수도를 중심으로 편제된 것이 아니라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사비시대로 들어가면서 새로이 편제된 5방 등의 지방통치 조직은 그 전대인 동성왕.무령왕대 확보된 전라도 지역까지를 아우르기 위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백제의 지방행정 조직은 37군 200현 정도였다고 짐작되는데 전남지역에는 12군 45현이 있었다.
이처럼 영암을 비롯한 전남지역에 대한 백제 중앙정부의 통치력 강화는 전남지역의 개발을 통한 한강유역의 상실에서 빚어진 경제적 기반을 보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전남 지역에 대한 백제 중앙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이 지역의 토착세력은 점점 약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의 토착적 문화요소도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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