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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081회 작성일 22-04-2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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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종대의 지방제도와 영암

 고려의 지방제도는 성종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성종 2년(983년)에서 14년(995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즉 호족세력의 제거왕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정비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성종이 지방제도의 정비를 처음으로 착수한 것은 성종 2년(983년)으로 시행된 조처들은 다음과 같다. 중앙집권적 통치체계를 완성하기 위하여 원년에 백관의 명칭을 바꾸었고, 2년에는 12목에 목사를 파견하고 중앙관제를 정비한 뒤를 이어, 지방 주현의 정수에 따라 공해전시를 지급하고, 주부군현의 이직을 개편하였다.

 당시 12목이 설치된 지역은 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 등 12개 주였다. 이들 12개 주는 통일 신라이래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방 행정상의 요지였으며, 특히 광주, 충주, 황주, 청주, 나주, 승주 등은 태조 왕건과 밀접히 연결된 호족세력이 존재하였던 지역으로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지역이었다. 더불어 그 지역의 호족세력은 고려 태조와 혼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지금의 전남지방에는 나주목과 승주목이 설치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 9주 가운데 하나였던 무진주(지금의 광주)대신에 고려 성종대에는 난주, 승주가 최고 지방 행정 단위가 된 것이다. 성종 2년 당시 목이 지방 행정의 중심이었으므로 영암은 나주목의 관할 지역이었을 것이다.

 지방제도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성종 2년 당시에는 영암은 별다른 세력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종 2년의 지방제도는 그뒤 재검토를 당하게 되고, 성종 14년(995년)에 10도제실시와 절도사체제 확립이라는 일련의 조치가 나타나게 된다.

 성종 14년에 실시된 10도제는 당의 10도제를 본딴 재도로 그 내용이나 특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으며,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의 영암 및 전남지방은 해양도에 해당된다, 해양도는 낭주(영암), 나주, 광주, 정주(영광), 승주, 패주(보성), 담주(담양)등의 주현으로 구성되어 졌다.

 10도제의 실시와 함께 절도사 체제로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된다. 즉 성종 2년(983)에 설치되었던 12목이 절도사로 개편되었으며 도호부사를 장관으로 하는 5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여기에 7도포련사, 11포련사, 21방어사, 15라사 등이 설치되는데 이는 호족세력을 견제하여 더 안정된 중앙집권을 꾀하려는 조치였다, 절도사 체제는 당의 절도사 체제를 모방한 것으로 지방 행정에 있어 군사적인 면이 크게 강조된 것이었다.

 성종 14년(995년) 지방제도의 정비에서의 영암의 위상은, 지방관의 등급에 있어 나주나 승주보다 높은 도호부사가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암에 설치된 안남도호부는 고부에서 옮겨온 것으로, 도호부는 북방의 육지로 부터 서.남쪽의 해상에 이르기까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성종 14년의 지방제도 정비에서 살펴보듯이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방관이 각 도로 파견됨을 알 수 있다.

영암에 설치된 안남도호부는 고부에서 옮겨온 것으로, 도호부는 북방의 육지로부터 서.남쪽의 해상에 이르기까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었다.

 성종 14년의 지방제도 정비에서 살펴보드시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방관이 각 도로 파견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아직도 남아있던 호족세력을 통치하는데 군정적 성격의 행정체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성종대의 지방제도 정비는 영암의 위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댜 주었을까?

 통일신라기이 이웃한 반남군의 정치적 지위에 다소 위축되었던 영암군은 성종 14년(995년) 낭주안남도호부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해남군.강진군 일부의 반남에 속했던 곤미현까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군으로 성장하게 된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영암에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에서도 성종 2년 당시 최고의 행정단위였던 나주와 승주보다 높은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던 것이다, 결국 고려시대의 영암지역은 현재의 영암. 해나. 강진을 묶는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서남부 행정 중심지로 자리매김 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영암지역의 정치적인 부상은 그 이유와 배경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몇가지 사실들을 살펴보면서 서술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 입지적 조건에서 서남해를 경유하는 해로와 밀착되어 국제문화의 교역로로서 뿐만 아니라 세곡의 수송로로서 매우 중시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영암이나 완도가 통일신라시대 행상권의 중심지였고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이러한 교역로를 통해 무역 근거지로 번성하였었다. 또한 5세기초에 왕인박사가 이곳 구림의 상대포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설이 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 등이 당나라로 건너갔던 지역이기도 했다.이와 같이 영암지역은 역사적으로 일찍부터 주목되는 지역이었을 뿐만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이후 대중국 교류의 출발지 혹은 중간 기착지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던 곳이었다.

 둘째,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에서 뚜렷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영암의 호족들이 왕건의 후원자로 등장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후술하겠지만 도선의 일화라든가, 최지몽(907~987)의 태조와의 인연 등이 그것이다. 더불어 영암지역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한동안 후백제 세력의 최후 근거지였던 호남지역에 대한 견제를 나주. 영광 등과 함께 담당하였던 중추적인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건국후 영암지역의 정치적인 부상을 충분히가능하게 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종 14년의 지방제도 개편은 후대 왕들에 의해 다시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는 성종대의 지방제도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음을 입증하여 준다. 그것은 시행 10년만인 목종 8년(1005년)에 12절도사, 4도호부사와 동서북계의 방어진사, 현령, 진잔만은 그대로 두었으나 도단련사, 단련사, 자사는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현종 3년(1012년)에 이르러서는 12절도사마저 폐지되어 현종대에 새로운 민정 지배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로써 성종 14년(995년)의 군사적인 지방관제는 없어지게 되고 새로운 민정적 지배체제로 변화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영암지역에도 나타나게 된다.


 사진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tuzang99&logNo=22120263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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