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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539회 작성일 22-05-06 16:10본문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70여 년 간에 걸쳐 우리나라의 연안 및 내륙에 침몰하였던 왜구는 일본의 해적집단이다. 삼국시대이래 우리나라의 연안에 출몰하였던 왜구는 고려말에 이르러 국토의 전해안을 유린하였고 때로는 내륙 깊숙히까지 창권하여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였다.
고려말 당시 일본은 묘부의 교체로 황실이 둘로 갈라져 서로 싸우는 남북조의 혼란기로서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고 백성들의 생활은 극심한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의 영세민들과 몰락한 무사들은 해적집단을 이루게 되었고, 특히 서부의 연해민들이 집단으로 해적단 또는 무력전 상인 집단을 이루어 인접지역이나 국가에 침입하여 약탈과 파괴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고려와 일본사이에는 고려초기부터 토산품의 진상과 긍에 대한 불사형식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을 통해서 일본인은 부족한 물품을 반입해 갈 수 있었으나 고려의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하사 형식의 교역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이는 미곡 등 생활필수품의 수입이 단절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에 왜구는 생필품을 얻기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인 약탈로서 이를 보상코자 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 왜구의 침입은 고종 10년(1223) 김주(김해)에 대한 것이 처음이었으나 본격적으로 나타나기는충정왕 2년(1350)무렵부터이고 우왕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왜구의 침입 지역 또한 초기네는 남해안 지역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함북을 제외한 고려의 전 지역을 망라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서부지방과 근접 거리에 위치한 경상도에 집중적으로 출몰하였고, 수도인 개경과 가까운 경기. 충남 지역에도 자주 출몰하였다.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데다가 많은 섬을 거느리고 있는 해안지역인 전라도 또한 왜구의 침입을 면할 수는 없었다. 전라도 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침탈로 많은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는데, 전라도 지역 침탈은 거의 전역에 걸쳐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 내륙지역인 광주나 장성 등지까지 왜구가 세력을 뻗친 것을 미루어 본다면 해안가나 도서지방의 경우 그 피해 상황은 가히 짐작할 만한 것이었다. 조운선과 조창을 습격하여 미곡의 약탈은 물론 수많은 인명의 살상, 그리고 우마와 문화재까지 노략질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암지역의 피해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충정왕 2년(1350)순천부에 왜구가 침입하여 영암지역의 조운선이 침탈당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당시 왜구의 침탈 주요 목적이 미곡의 약탈에 있었던 만큼 영암의 조운선도 공격을 당하였던 것이다. 영암의 조운선이 왜구의 공격을 받은 이후 영암의 인근지역인 목포, 강진, 장흥 등지와 내륙지방인 나주 광주 등지가지도 왜구의 공격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조창까지 설치되어 있었던 영암지역이 왜구의 피해를 다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진도군민이 영암지역으로 피난까지 오게되는 상황까지 벌어지는데, 이는 영암지역이 왜구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해남의 화원반도가 영암의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지리적인 영향 탓으로 왜구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구의 침탈이 갈수록 심화되고,서남해안 연안지역들의 혼란이 가중되자 개경의 고려정부는 조창의 이설, 군현치소의 이폐, 주민들의 이주 등 매우 소극적인 대책을 강구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소극책이
공도정책의 실시다.
공도정책이란 섬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켜 왜구가 출몰할 근거를 없앤다는 임기웅변적인 발상에 토대한 것으로 비단 섬지역 뿐만이 아니라 연해지역도 해안으로부터 50리 이내에는 주민들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조처였다.
1350년에 실시된 도도정책의 결과 진도같은 큰 섬의 주민들이 치소와 함께 현재의 영암군 시종면(당시는 반남현 종남향)으로 피난을 오게되며, 이후 영암의 북쪽 명산(현 영암군 시종면 태간리 명산)을 거쳐 1409년 해남으로 옮겨 갈때까지 60여 년 간에 걸쳐 영암에서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피난생활을 했던 지역에서 생활하던 진도사람들은 1437년 진도군이 복설되자 돌아가긴 하진만 잔류민이 많았던지 조선시대까지도 진도군 소속의 명산면으로 존재해오다 1906년에야 영암군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명산면에 속한 지역은 만수리의 4개 마을, 태간리의 9개 마을, 월악리의 6개 마을, 내동리의 4개 마을 등이었다.
왜구의 침입에 대하여 고려정부는 회유와 토벌의 양면으로 대처하였으나 회유책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무력에 의한 토벌책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을 강화하였으며 화약과 화포도 제조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 정자의 남해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등은 왜구를 격퇴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왜구의 침몰은 1389년 경상도 원사 박위의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수그러들기 시작하나, 왜구로 말미암은 고려 민중들이 당한 피해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미곡과 문화재 등 재화의 약탈, 인명의 살상 및 납치, 부녀자들의 노략 등 실로 막대한 것이었고, 고려정부의 존립기반마저 뒤흔들 정도였다.
그러나 고려정부와 민중들은 의연하고 용감하게 왜구 격퇴에 나섰고, 조선초기에 이르러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당시 고려 민중들이 흘린 피와 땀은 조선 왕조의 개창이라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영암의 향촌사회에도 그러한 변화가 찾아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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