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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426회 작성일 22-05-2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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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전래된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기에 이르러 호족세력의 대두와 함께 널리 전파되어 정치, 사회 등 각종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풍수지리설은 산세,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능묘 등을 선정하는 지상학으로서, 동양 고대과학의 한 특성인 선비적인 요소만을 제거하면 천문학이나 인문지리학 등 훌륭한 과학으로 볼 수 있었다.

 풍수지리설은 신라말 영암 출신의 선승 도선국사에 의하여 크게 선양되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은 도선에 의해서 전래된 것은 아니었고, 신라의 삼국통일이후 당과의 문화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중국에서 전래된것으로 추측된다. 풍수지리설은 신라말 도선이 풍수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쇠왕과 순역에 비보사탑을 세워 내잔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크게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도선은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알려지게 되엉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존경받게 되었다.

 도선은 영암의 구림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화엄사에서 축발하고 스님이 되어 불경을 공부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승려생활을 전라도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데, 다만 그의 나이 23세부터 37세가지 15년 동안 전국 각지를 방란 수련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전국 각지의 산수의 쇠왕과 순역을 점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송악군에 가서 왕건의 아버지 용건에게 집터를 잡아주고 왕건의 출생과 왕건에 의한 고려 건국을 예언했다고 한다. 도선이 이 기록대로 실제 송악군에 갔었고 왕건이나 용건을 만났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도선은 이미 신라고대사회의 붕괴와 지방에서 새로잉 등장하는 호족세력을 목격하고 있었다. 도선의 입장에서는 새로이 성장하는 왕씨세력을 주목하였을 것이고, 송악지방 또한 나라의 수도기 될만한 길지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왕씨 집안은 자기 세력의 성장을 위하여 도선을 이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그의 정치적 의도를 합리화시키는데 적절히 이용되었고, 도선은 고려왕실에 의해 존숭되었다. 현종은 도선을 선사로 추앙하였고, 숙종은 왕사로, 인종은 국사로 추증하였던 것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풍수지리설을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적절히 이용한 왕이었다. 그가 남긴 훈요십조에는 풍수지리설에 관한 내용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영암이 속한 전라도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제2조 : 모든 사원은 다 도선이 수의 순역을 추점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한 이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을 손부시켜서 작업이 길지 못 할 것이다'라고 항였다. 짐은 후세의 국왕. 공후. 후노. 조신들이 각각 원당이라 칭하고 혹 더 창건하면, 크게 우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신라말에 사탑을 다투어 짓더니 지덕을 괴손하게 하여 망하기에 이르렀다. 갈히 경계하지 않을것인가

2)제5조 : 승이 삼한 삼천의 음우를 힘입어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니라, 마땅히 사월중에는 순주하여 백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3)제8조 : 차현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함께 배역으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랫고을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하고 난을 일으킬 것이다. 또 일찌기 관청의 노비와 진역의 잡척에 속하면 무리가, 혹은 권세가에 붙어 이면하고 혹은 왕후. 관원에 붙어 언어를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농단하고 정사를 어지럽게 함으로써,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지어다.

 태조 왕건은 그의 후손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1)사원의 남설 금지 2)후삼국의 통일이 지덕에 의한 것이므로 서경을 중시하라는 것 3)특정지역 출신의 인재등용을 제한하라는 것으로 구 후백제 지역에 관한 내용이다.

 위의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태조 왕건은 풍수지리설의 대단한 신봉자였다. 그는 후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삼한 삼천의 음우에 힘입었다고 할 정도였고, 서경 또한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어 대업을 자손만대에 전할 땅이라고 하였다.

 태조에 의해 서경잉 중시된 것에 비하면, 영암이 속해있던 전라도 지역, 즉 구 후백제 지역은 고려 왕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제8조) 태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차령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사람들을 등용치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차령 이남 노령을 넘어 전라도 전 지역으로 해석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따르지만 어쨌든 태조는 구 후백제 지역에 대해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영암지역의 면모를 살펴 볼때 훈요 8조에 나타난 것과 같이 영암을 비롯한 전라도인들이 경계의 대상이 된다거나 부정적인면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영암은 태조의 후삼국 통일시 중추적인 역할을 당당했으음은 물론이고, 후삼국 통일후에도 나주. 영광 등과 함께 후백제 세력의 견제를 담당했던 지역이었다.

 이같은 결과로 보이지만 고려시대 호남의 서남부 행정중심지로서 현재의 강진. 해남을 아우르던 영암군의 위상은 훈요 8조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결과였다. 아울러 ㅇ왕건이 예우하고 항상 곁에 두고서 정치적 자문을 구했던 풍수지리설의 신봉자들은 모두가 차령 이남 지역이었던 영암 사람들이었다.왕건과 직접 관련을 맺지 않았으나 그의 가문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도선은 물론이고, 그의 사법제자로 자처하였던 경보가 있다. 또한 천문과 복서에 능하여 왕건의 꿈을 해몽하고, 장차 후삼국을 통일하리라 예언하였던 최지몽도 있다. 특히 태조 왕건은 최지몽에게 지몽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전쟁터에 나아갈 때에도 항상 수행케 할 정도로 최지몽을 신임. 존중 하였다. 이들이 모두 영암 출신 인물들이었던 것이었다.

 이상의 내용들을 놓고 볼때 차령 이남과 공주강 즉 금강밖의 사람을 등영하지 말라는 태조의 훈요십조는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같다.

 더불어 풍수지리설의 종조로 불리어진 도선은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광양 백계산 옥룡사에서 35년간 머물러 있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이 그곳을 명당으로 생각하고 마지막 터전으로 삼은 지역 또한 전라도 지역이었던 것이다.

 도선에 의해 크게 전파된 풍수지리설은 왕건이후 현종대의 김위제와 인종대의 묘청에 의해 다시 정치적 의도로 활용되되는데, 이들 모두 도선계통의 인물로 자처하는 바, 이는 풍수지리설에 있어 도선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의도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생활에 있어 불행을 피하고 행복과 번영, 장수를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풍수지리설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고려시대를 통하여 정치. 사회는 물론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에게가지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던 풍수지리설은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 500년을 거쳐 과학문명을 추구하는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생활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 : https://blog.naver.com/jungyoupkim/22184070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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