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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3,146회 작성일 22-04-25 09:24본문
1979년 8월 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묘는 원래 해남면(海南面) 동북선산에 있던 것을 1718년(숙종 44)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전체넓이는 1,416㎡ 정도이다.
묘전에는 묘비·상석·향로석 등을 설치하였고, 문인석·망주석·동자석을 각각 쌍으로 하여 양옆에 세웠다. 신도비는 1905년(순조 5)에 세운 것으로, 묘를 이장하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207cm, 너비는 85.5cm이며, 묘역에서 150m 떨어진 마을 뒷산 기슭에 서 있다. 박세채(朴世采)가 찬하고, 최석정(崔錫鼎)이 전서하였으며, 조명교(曺命敎)가 글씨를 썼다.
김완의 본관은 김해, 자는 자구(子具),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영암에서 태어났으며, 정유재란 중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휘하에 들어가 용맹을 인정받았다. 그해 무과에 급제, 경상방어사의 막하로 들어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왜적을 만나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갔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옥사시킨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裨將)으로서 병력 점검을 위하여 온 것을 죽이려다 실패하였다.
모포(毛浦)의 만호(萬戶)·남원판관 등을 지낸 뒤, 서울에 가서 한덕수를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수년 동안 투옥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평정에 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훈련원도정·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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