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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2,517회 작성일 22-03-04 16:17본문
2016.01.22
영암문화원은 새해 첫 향토작가 초대전에 비운의 천재화가 오영일 작가를 초대한다.
오 작가는 1946년 영암에서 태어나 영암을 기반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던 화가다. 어린시절 그림에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하여 16세부터 광주의 의제 허백련 선생의 연진회 계열 스승을 찾아 한국화를 익혔다. 20대 초기에는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김응수 화백으로부터 6년간 그림을 사사받았다. 인사동 주변을 떠돌며 낮에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밤에는 그림에 몰두하며, 틈틈이 부모님이 계신 영암을 찾았다. 영암의 지인을 통해 남농 허건 선생과 교유하면서 35세에 영암군청앞 예식장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80년대 오영일의 작품은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주요 언론사 및 미술관 등의 초대전에 소개되었다. 1984년 인사동 경인미술관이 개관되자 마자 개인전을 가진 오 작가는 1억 4천여만원에 달하는 작품을 팔았다. 당시 어지간한 교수들도 취할 수 없는 대성공이었다. 경인미술관 전시이후 오 작가는 광주시립미술관, 대구시립미술문화회관, 부산문화회관, 서울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인사동 공평아트센터 등 유명화랑에서 대규모 전람회를 열었다. 전시는 대성공이었고 그의 작품은 각종 매스컴에서 주목받으며 작품판매로 이어져 4억원 가량의 판매수입을 올리며 유명호텔과 콘도에서의 주문도 이어졌다.
그의 작품은 한국화, 서양화, 추상화, 사실화등 다양한 스타일에서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국방송공사 사장상(2회), 내무부장관상, 현대미술대전 동상, 목우회 입상,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상(3회), 강남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했으며 현대미술과 신미술 추천 작가로 활동했다.
전업작가로 성공한 오영일 화백은 1995년 10억여원을 투자하여 아천초등학교 자리에 미술관을 짓고, 군서면에 카페형 '그림의 집'을 개관하였다. 하지만 오영일 작가의 비운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천초등학교 미술관 사업에 제동이 걸리고, '그림의 집'이 남에게 넘어가면서 그의 수상경력을 문제삼는 시비가 있었다. 사실 오영일 작가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오비천 또는 오인당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비천 또는 인당은 그의 화명이다. 마치 문학인들이 자신의 이름 대신 필명을 따로 갖는 것처럼 오영일은 비천 또는 인당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었다. 잘 나가는 작가는 시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부를 쫓는 이의 먹잇감이 되기도 한다. 오 작가는 이 시기에 버티지 못하고 뇌졸중을 앓고 말았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15년을 숨죽여 살았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병환은 느리게 호전되기 시작하여 2년 전부터 집 밖으로 출타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련은 아직 진행중이다. 과거의 필력을 되찾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영암문화원은 이 달의 초대작가로 오영일 작가를 초대하여 그의 이름 찾아주기에 나섰다. 김한남 원장은 "우리 고장 출신의 재능 있는 화가를 다시 발굴한다는 심정으로 오 작가를 초대했다"며 "오는 27일 오후 2시, 초대전 개막식에 고향 선후배가 참석하여 오 화백의 재기에 박수를 보내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 날 개막식에는 문화가 있는 날을 맞이하여 부채춤, 한량무, 판소리 등 작은 공연이 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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