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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670회 작성일 22-09-0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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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김창조가락 가야금산조」를 지은 거문고명인


가야금·거문고·양금·젓대·퉁소·해금 등 모든 악기에 능했다. 19세 때부터 시나위 가락에 판소리가락을 도입하여 민속장단인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장단에 짜넣어 산조의 틀을 만들었다고 전한다.연주시간 15∼20분의 김창조가락 가야금산조를 한성기(韓成基)·최옥산(崔玉山)·김병호(金炳昊)·강태홍(姜太弘)·안기옥(安基玉), 정남희 등에게 전수하여 각 연주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가락을 첨가하였으나, 그 틀은 그대로 남아 연주되고 있어 그 맥을 잇고 있다. 그의 손녀이며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였던 김죽파(金竹坡)가 대부분의 가락을 이어왔다.김창조는 1856년 7월에 전남 영암군 영암읍회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습적인 율객(기악 연주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원래 재인(才人 : 당시의 신분제도에서 천민에 속하는직업적 음악가들에 대한 명칭) 계층에 속했던 그의 음악만으로는 생계가어려워 농사를 겸하는 빈곤한 처지에 있었다.김창조는 가난하고힘든어린시절을 보내었으나 어렸을때부터 민간악기들의 음악소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수업을시작한것은 7~8세정도였는데 그의 음악에 대한숙달속도는 매우 빨랐으며, 음악형상(音樂形象)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일찍부터 그 주위로부터 음악적 재능이 인정되었고전도가 촉망되었다.김창조가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에 들어선 것은 그의 나이 30세 (1885년)부터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엄격하였다. 그것은 당시 음악계의 흐름인 흥행적이며 세습적인 것을 따라가지 않았다는것과 자기 예술을 공개함에 있어서도 범상치 않은 절제를 준수하였다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1890년(35세) 이후에는 연주와창작 그리고 후진양성을 병행하여 왕성한 활동을 했다. 특히 1890년부터 1895년 사이에는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산조(散調)라는 하나의 음악형식을 개척하였다. 그는 산조를 가지고 광범위한 대중(군중 앞에 출연하였다. 전주와 광주를 위시한 전라도 일대와 경상도 대구 등지를 무대로 동서를 오가며 활동했다. 김창조의 활동이 일부지역에 국한되었다고는 하나가뿌린 산조의 씨앗은 도처에서 뿌리를 박기 시작했고 더욱 넓은 범위로 대중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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