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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111회 작성일 22-04-2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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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에 현재의 영암지역에는 월나군, 아노욕현, 고미현 등 3개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이식의 군현은 현대의 군현들처럼 뚜렷한 행정편제나 관할범위를 갖은 것은 아니었으며, 대체로 촌주의 호족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리라고 판단된다. 대체로 이들 3군현의 위치는 1)월나군이 현재의 영암읍,군서면,덕진면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2)아노곡현은 금정면의 북부와 나주시 세지면 등지 3)고미현은 미암면.학산면.삼호면 일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들 3군현의 정확한 치소가 과연 어느 곳이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가 있는데, 아노곡현의 경우만이 명확하게 금정면 안노리로 확인될 뿐이며 고미현지는 미암면 미암리 향안 부금으로, 그리거 월나군은 아직 확실한 자료를 발견할 수 가 없다. 따라서 서호면처럼 백제시대 혹은 그보다 앞선 마한.선사유적이 집중된 지역이 과연 월나군에 속했던 지역인지 아니면 고미현에 속했던 지역인지도 불명확다. 또 시종이나 신북면 지역의 경우도 당시 인접해 있던 반나부리현에 속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역시 확인할 근거는 없는 실정이다. 지역환경으로 보아서는 금정쪽의 아노곡현이 약간 동떨어진 문화기반을 가지면서 섬진강 유역의 문화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고, 반나부리현.월나군.고미현은 크게보아 동일문화상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들 3군현이 언제 백제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일단은 이들 지역이 백제에 복속 이후로 추정할 수 있지만, 실제 완전한 복속과 행정 제편성은 상당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어서 좀 더 후의 문제로 보인다. 그리고 잉 시기의 군현들은 오늘날과 같은 상하조직을 분명히 갖춘 상태가 아니라 독자적인 지방세력에 의해 지배되어 왔었기 때문에 백제로서는 다만 영토로 포함시킨 사실에 더 큰 의의를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문화기반이나 성격상 토착성이 강한 이 지역의 경우, 독자적인 종래의 지배체제를 고수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예견된다. 한편 이러한 군현위치와 함께 우리는 백제시대의 영암지역문화를 조명할 때 왕인이라는 전설적인 인물과 그의 입신이 가능했을 만큼 발달했던 이 지역의 문화수준을 고려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왕인이라는 인물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서의 영암지역은, 비단 백제의 한 부분으로서라기 보다오히려 더 범위가 큰 문화교류 속에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이상 이해준 교수 글을 요약한 것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한 후 백제 고지에는 당의 웅진도독부 관할의 동명.지침.노산.사반.대방.분차의 7주와 52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전남지역에는 사반(장성 또는 영광), 대방주(나주 또는 회진), 분차주(낙안 또는 광주) 등의 3주가 있었다. 따라서 영암지역은 대방주의 관할에 놓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신라가 당군을 몰아내고 671년에 사비성을 소천리주로 삼으면서 영암지역을 포함한 백제 옛땅은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사진출처 http://yeongam.grandculture.net/yeongam/popup/multimedia/GC044P0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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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내동리 쌍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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