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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104회 작성일 22-04-2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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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통일신라시대의 전남

 통일전쟁에서 승리를 한 신라의 새로운 정치세력 집단은 대외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통치기반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를 위하여 1)유교적 도덕규범을 확산시키기 위해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적극 받아 들이고 (國學의 설치.讀書三品科의 시행) 2)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해 敎學 佛敎를 발전시키고(화엄종.법상종) 3)정권의 정통성과 고구려나 백제의 피정복민을 회유하려는 데서 새로운 역사인식으로 통일삼한의식을 시도하였다. 또한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행정구역의 개편과 정치, 군사제도 등을 정비하였다. 관료들에게는 관료전을 지급하고, 장기간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민 경제를 복구하려는 조처로 조세의 감면과 정전이 지급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을 중심으로 멀리 서역 상인들과 활발한 대외무역이 전개되어 상업자본이 성장하였다.

 한편, 통일전쟁에서 승리를 바탕으로 지배체제를 강화하는데 성공하여 기존의 지배 질서를 확립하였던 신라사회는 하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대의 두드러진 변화상은 정치, 사회,의 각 부분을 규정하여 오던 골품체제의 동요를 들 수 있다. 무열걔 중심의 왕위 계승이 무너지면서 골품문제보다는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에 의해서 왕위계승이 결정되어 갔다. 아울러 도당 유학생을 중심으로한 육두품 세력의 정치적 도전도 거세어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녹읍의 부활, 귀족들에 의한 대토지 겸병이 전개되고, 사원경제도 비대해 가고 있었다. 또한 성주, 장군을 자칭하면서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형성한 호족세력이 나타나 중앙정부와 맞서고 있었다. 이들에는 촌주, 해상세력, 지방의 군진세력 뿐만 아니라 초적의 무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시 반발하였던 농민들의 봉기를 결집시키면서 성장을 거듭하여 신라정부를 경주 지방정권으로 전락시켰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한 후 옛 백제 땅에는 당의 웅진도독부 관할의 동명,지침, 노산, 고사, 사반, 대방주, 분차주의 3주가 있었다. 그후 신라가 당군을 몰아내고 671년에 사비성을 소부리주로 삼으면서 백제 옛 땅은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즉, 문무왕대부터 신문왕대에 이르기까지 신라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는데, 9주 5소경이 그것이다.

 이때 전남은 주치소가 지금의 광주 무주의 관하에 들어갔다. 전남지역에 무주가 설치된 것은 적어도 문우왕 18년이전으로 무주에는 15군 43현이 있었다.

 이때 주.군.현에는 중앙에서 장관.부관이 파견되었고 그 밑의 실무 행정은 지방민이 맡았다. 주.군.현의 책임자는 중앙의 위계를 가졌지만 실무행정은 지방의 토호들이 맡았다. 이들 토호들은 각기 외우를 받았는데 약간, 수간, 고간, 귀간, 선간, 상간, 간, 일벌, 피일, 아천간 등이다.

 이처럼 신라는 지방행정 조직을 정비하여 지방을 통제하고자 하였으나 토호세력이 온존해 있었다. 따라서 이들 토호세력을 중앙정부는 서울로 불러들여 토지를 주는 조처를 하여 지방의 토호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는데, 무주 토호인 안기릉 중앙으로 불러들여 성부산 아래의 30무의 땅을 주었다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한편, 당시 신라에는 23군단의 군사조직이 있었는데 전남에는 10정의 미다부리정과 만보당이 있었는데 미다부리정은 현재의 나주지방에 위치하고 있엉ㅆ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전남에는 신라의 삼사가 있었다. 삼사는 명산부천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말하는데 전남에는 중사가 완도 청해진에 있었고, 소사로는 월나악(영암 월출산)과  무진악(광주 무등산)이 있었다.

 그런데 전남은 지리적으로 영암지역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국 양자강 방면의 양주~명주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이 있었고, 이는 후일 청해진이 설치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전남지역은 당시 무주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국, 신라 5악의 하나인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 청해진이 있는 완도, 영암을 중심으로한 문화권 등의 3개의 문화권이 있었다. 이러한 동일 지역내의 각기 다른 문화적인 차이는 지역내의 세력갈등을 가져왔다. 예를 들면 장보고와 무역주인인 염장의 갈등, 장보고의 부장인 이창진과 무주의 별장인 염문의 갈등이 그것으로 이 때문에 청해진인이 전북의 김제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후삼국시대에 영암, 나주세력들이 왕건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이상 전남지상사설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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