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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171회 작성일 22-04-2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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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660년) 고구려를 쳐(668년) 반도를 통일하자 그 영토는 통일 전보다 3배정도 확정되었다. 이에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각 주 밑에 군을 두고 그 밑에 현을 두는 피라밋형의 행정조직 체계를 세우고 있었다.

 영암에 있던 백제시대의 3군현은 통일신라에 들어와서도 별 차이 없이 명칭만 변하고 있다. 즉,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의 한화정책인 군현 명칭의 개정때 1)월나군은 영암군으로 2)고미현은 곤미현으로 3)아노곡현은 야노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던 것이다. 여기서 백제시대의 군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현으로 강등된다거나 현이 군으로 바뀌는 등의 연유에 대해서 인접한 균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영암지역과 인접한 백제의 군현들은 월나군과 물아혜군(무안), 도무군(강진), 발나군(혹은 폐나주군, 나주)뿐이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경덕왕때 있어서의 군현의 새로운 변화를 알 수 있게 된다. 그 변화의 특징은 백제때 반나부리현이 반남군으로 명칭과 격이 달라지고 현재의 영암지역에 있었던 백제의 아노곡현과 고미현의 명칭이 각각 야노현과 곤미현으로 바뀌면서 신흥한 반남군의 영속으로 포함되고 있으며 월나군은 명칭만을 영암군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주된 요인은 반남군의 급성장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경덕왕대의 행정편제상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 했었는지는 알 수 가 없다. 그러난 인접한 반남군의 성세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소간 위축되었을 영암군은 이후 고려 성립기가지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은 흔적은 찾기 어렵다. 단지 월출산에 신라의 국제로 월나악제가 지내졌음이 밝혀지고 있다.

 한편 "대동지지" 영암군 연혁책에는 통일신라시대에 고안현이 영암의 령현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착오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고안현은 현재의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치소를 두었던 백제 고서이현의 신라때 이름으로 영암군이 아닌 양무군의 령현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고서이현→고안현→즉산현으로의 변화와, 이들을 영속시켰던 무양군이 후일 영암군의 속군이 된 사실과 혼동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편 영암은 통일신라말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으면서도 발전한다. 당시 중국과의  무역로는 경기도 남양만으로부터 항해를 거쳐 산동반도의 등주 문등현으로 가는 항로와, 영암방면에서 흑산도를 거쳐 산동반도의 양주나 명주에 이르는 항로가 있었는데 왕도인 경주에서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어 경기도로 가는 것 보다는 영암이나 완도를 이용한 경우 육로로도 험준하지 않고 해로를 통해서도 휠씬 수월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당시 영암이나 완도가 통일신라시대의 해상권의 중심지였고 조공이나 무역, 유학자들도 모두 이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또한, 장보고의 청해진 세력은 이러한 교역로를 통한 무역 근거지로 번성한 것이다.

 또한 지방호족들의 군응할거 시기인 나말여초의 격동기에 있어서 영암은 새로운 변화를 계속한다. 왕건과 궁예가 견휜의 배후세력을 견제키 위한 서남해 세력거점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영산강유역은 견휜과 왕건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그 결과 고려왕조가 성립되던 시기에 영암은 면모를 일신하여 호남의 대군으로 성장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사진출처:https://blog.daum.net/life112/5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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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군 군서면 정원명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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