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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156회 작성일 22-04-2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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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하대 중앙 진골귀족을의 내분으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 대두한 지방세력은 중앙에서 지방으로내려간 낙향귀족과 토착적인 지방세력이 성장한 두 유형이 있었다. 이들 지방세력은 해상무역을 통하여 세력을 확충하기도 하고, 변경 수비나 해안의 해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진을 중심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청해진의 장보고는 이때 성장한 대표적인 세력으로 해상무역, 군사적인면에서 막강한 힘을 소유하였다. 그는 비단 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중앙의 정치까지 관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지방세력의 성장은 지방민을 유리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백성들은 중앙정부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하여도 공부를 내야하는 이중적인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더우기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백성의 유망현상은 가속화 되었다. 

 이들은 무리지어 도적이 되거나 호적의 보호속에서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은 초적이라 하여 농민반란군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들 가운데 신라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인물은 후백제(892~935)의 견훤과  태봉(901~918)의 궁예였다. 이와 같은 후삼국으로의 분열은 마침내 왕건에 의해 고려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후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내란기였다. 백제와 고구령의 부흥을 구호로 내세운 견훤과 궁예가 각기 신라에 척대하는 독립적인 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후삼국시대라 부른다.

 후백제의 견훤은 서남해의 방술군 비장으로 있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큰뜻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남지방의 주현을 쳐서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호응이 대단하여 몇 개월 사이에 군사 5천이 모이게 되자 진성여왕 6년(892)에 무진주(광주)를 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전라남북도,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효공왕 4년(900)에는 완산주(전주)호 도읍을 옮기고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면서 백제왕을 자청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후백제는 한때 호남과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경상도서부까지 세를 확장하였는데, 대체로 충청남도의 중부섬에서 태봉(고려)과 대치하였고, 남쪽에서는 전라남도의 서남부에서 왕건의 수군과 다투었고 동쪽에서는 상주, 합천, 진주를 잇는 선을 전선으로 하여 한때 안동, 영천, 경주 등에까지 세력을 뻗치기도 하였다.

 견휜은 효공왕 4년(900) 완산(전주)에 도읍을 옯기고 후백제왕을 칭하면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남중국의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한 궁예가 밀려나고 왕건이 등그하자, 그의 즉위를 축하하며 호위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견휜은 백제의 복흥과 신라의 타도를 표방하면서 후백제를 건국함으로써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궁예가 왕건을 파견하여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지방 경락에 힘을 기울이게 되자 새로운 각축의 분쟁이 싹뜨게 되었다.

 901년 견휜이 신라의 대야성을 쳐서 함락하지 못하자 군사를 금성(나주)남쪽으로 옮겨 변경 마을을 약찰하자 견휜의 침략에 불만을 품은 나주와 인근 영암, 도서 지방세력이 견휜에 반기를 들어 903년에 왕건에 투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견휜에게 동조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갈등이 계속되다가 궁예 휘하의 왕건이 이끈 해군이 금성을 쳐 빼았고 10여 군현을 취하여 나주로 이름을 고친 것이 911년이다.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여 장악하고자 했던 목적은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대중국 교통로를 차단 해상세력의 분열을 꾀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건은 나주를 비롯하여 진도군, 고이도성, 영암 덕진포, 연해현, 목포, 반남현포구, 압해현, 갈초도 등을 무대로 해상활동을 펼쳐 진도와 목포 서남의 여러 섬을 정복하자 견휜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목포에서 영암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왕건의 승리로 끝났다.

 견휜과 왕건세력의 각축은 주로 현재 목포에서 영암, 무안, 나주 등지의 영산강을 무대로 한 이와 관련된 해상세력과의 싸움이었다. 왕건세력은 영산강 남쪽에, 견훤세력은 영산강 북쪽지역에 포진하였다. 나주는 영산강 중류에 자리잡고 있어 견휜과 왕건세력의 접경지역이었던 셈이다. 나주와 무주는 가까운 거리인데도 후삼국통일전까지 후백제의 관할이었다. 왕건의 나주와 견휜의 무주는 서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건의 나주공략으로 해상권을 빼앗간 견훤은 그것을 찾기위해 서남해안 일대에서 잦은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왕건은 나주지방을 계속 확보하려고 해군대장이 되어 수군을 통솔하고 여러차례 나주에 출진하였다.

왕건이 나주지방 일대를 출진하였던 것은 지리적으로 후백제의 배후를 공략하려는 의도가 강했지만, 궁예의 시기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건은 나주에 와서 오씨를 만나 결혼하였는데, 이가 장황왕후이며 혜종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부친은 다린군인데 그는 목포지벙의 호족이었던 듯하다, 특히 목포와 나주지역에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해상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나주를 정복한 이후 견훤의 공격을 빈번하게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실력자인 다린군과 같은 호족세력의 호응을 얻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이상 전남지방사서설에서 요약함 것임)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나주는 영암과 동일한 지역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영암은 고려 성종 14년(996)에 안남도호부가 설치되는데 도호부는 군사상 요지에 설치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영암도 역시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왕건이 공략했던 나주도 오늘날의 나주시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산강 유역 일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견훤이 방술한 지역은 나주였고, 따라서 나주는 곧 견훤의 세력근거와 다름없는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의 후삼국의 통일은 결국 견훤과의 나주공방전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반도를 재통일한 이후에도 한 동안 후백제 세력의 최후 근거지였던 호남지역에 대한 견제를 늦출 수가 없었고, 나주, 영광, 영암 등지로 하여금 견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즉 고려초의 영산강유역 군현들의 변모를 분석해 볼때 이 시기에 갑자기 정서적 지위와 세력범위가 축소된 지역과 반대로 확대된 지역이 구분되고 있었다. 예를들면 무안군이나 반남군이 바로 전자에 해당되는 경우로서 통일시라기의 당당한 판도를 완전히 상실한 채 나주에 예속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반하여 영광, 영암의 경우는 마치 통일신라기에 반남이 갑자기 급성장하듯이 그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즉 영암은 현재의 영암, 해남, 강진을 묶는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호남의 서남부 행정중심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영암지역의 부상은 그 이유와 배경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대개 당음의 몇 가지 사실을 염두해 두면서 이 시기의 변화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영암의 입지적 조건이 서남해를 경유하는 해로와 밀착되어 있고, 그에 따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해로가 차지하는 의미는 컸으며 실제로 서남해를 통과하는 일본-중국과의 해로는 국제문화의 교역로써 분만 아니라 세곡의 수송로로서도 매우 중시되었다. 통일신라 이후의 빈번하고 계속적인 대중국교류가 이 해루를 이용한 것이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며, 출발지 혹은 중간기착지로서 영암지역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둘째, 후백제와 고려가 각축을 벌였을때 영암의 호족들이 왕건의 후원자로 등장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고려 건국후 이 지역 군현들의 지위변화가 대체로 그러한 성향과 연결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점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도선의 일화라든가, 구림의 최지몽(907~987)의 태조와의 인영 등은 그런 분위기를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셋째, 영암지역이 새롭게 부상되는 이유라기 보다는 그 결과로 보눈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르나, 문화적인 조영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월출산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발전된 불교유적의 내용은 이러한 역사적 부상의 결과이기도 하려니와 좀더 본질적으로는 그러한 문화적 배경위에서 역사적인 성장도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사진출처:http://www.gycitize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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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산성 출토 당나라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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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복원된 옥룡사지 통진대사 경보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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