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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499회 작성일 22-04-26 14:22본문
고려는 신라 경명왕 2년(918) 지방 호족세력들의 호응을 얻던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다. 송악지방의 호족출신인 왕건은 궁예 휘하의 무장들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그들로부터 고령의 국왕으로 추대받았다. 신라에서 후삼국으로의 분열이 이들 호족세력의 대두에 따른 결과라고 볼때 고려의 건국은 역성혁명일 뿐 아니라 새로운 호족세력들에 의한 고대적 체제의 극복이라 하겠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반독립적인 호족세력들에 의해 지방의 통치가 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 곳곳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반독립적인 호족세력들에 의해 지방의 통치가 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는 성종대에서 문종대에 이르는 기간에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질서가 완비되었다. 지방의 호족들이 중앙정치에 참여하여 관료화 되는 동시에 점차 문벌귀족을 형성하였던 것이다.그리고 이들 귀족들이 정치.경제.사회 문화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문벌귀족 사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은 이자겸, 묘청의 난으로 드러났고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난을 계기로 붕괴되어 갔다. 무신난은 고려사의 흐름에 하나의 획을 긋는 시간으로 문벌귀족정치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무신난은고려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100여년간 계속된 무신집권기는 집권 무신 내부의 분열과 몽고의 침입으로 막을 내리고 이어서 몽고 간섭기에는 새로이 권문세족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후기에는 권문세족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이 또 다시 대두하고 있으니 신흥사대부계층이었다. 이들은 보수적인 권문세족에 대립하여 개혁정치를 주장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신흥사대부는 이성계와 결탁함으로써 조선건국의 주역이 되어 조선양반사회의 토대가 되었다.
이상으로써 간략하나마 고려시대 정치상황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고려가 건국되면서 영암지역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가?
고려시대의 영암은 현재으이 강진, 해남, 영암을 묶는 커다란 세력권을형성하면서 서남부 행정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같은 종치적 부상은 그 이유와 배경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몇가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고려시대 영암의 지위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서술하고자 한다.
본편에서는 먼저, 중앚정부가 호족들과의 미묘한 관계속에 왕권 강화를 ㅇ위해 시도했던 지방세도 정비속에서 영암이 편제되어 가는 과정과 그 의미를 찾고, 부곡제를 통한 영암지역 내부구조의 이해, 앙울러 영암에서 수취된 조세와 공물들이어떠한 운송 수단을 통해 중앙에 운반되었는가를 역참제와 조운제를 통하여 살펴 보겠다.
두번재로 우리니라 국토의 존 해안을 유린했던 왜구의 침탈상과 무신집 권기의 막을 내리게 했던 몽고군의 침략과 영암인들의 국난극복의 과정을 살펴보겠다.
세번째로 영암출신이거나 영암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인물중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활동상황이나 진출 배경등을 살펴봄으로써 영암지역에 대한 이헤의 폭을 넓혀 보겠다.
마지막으로 고려시대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하였돈 불교와 유교를 영암지역과 관련지어 살펴보고, 풍수도참과 관련하여 태조 왕건과 최지몽과의 관계, 또한 많은 미술사적, 공예품, 문화유산 등을 통해 영암지방의 문화적 분위기를 이해하여 보겠다.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살피기 위해서는 한국사 전체적인 내용이나 전라도 또는 전남지역의 개괄적인 이헤도 필요한 일이다. 이같은 개론적인 내용은 쥬로 "전라남도지"(제3권 1993)를 참고하였다.
사진출처:http://www.reader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855
금동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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