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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488회 작성일 22-04-27 11:34본문
현종대에 일단락 지어 고려의 지방제도는 예종 원년(1106)부터 시작된 감무의 파견으로 군현체제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감무는 예종대와 명종대에 많이 파견되는데, 이는 종래의 주현 속현체제의 모순해결을 위한 것으로 주현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받는 속현의 처지를 개선하여 유민의 발생을 억제키 위한 조치였다.
고려시대 감무파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서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광범위한유민들을 안집하기 위해 파견한다고 적고 있다. 예종은 유민 문제의 근본원인을 주현의 속현 수탈과 수령의 탐학을 지적하고 감무의 파견을 통한 속현지역의 직접지배를 그 해결책으로 보았던 것이다. 예종대의 감무 파견은 동왕 1년~4년 사이에 전라.경상 지역을 포함한 전국의 80여 개 지역에 파견된다,
예종대 감무 파견이후 30여년 후인 인종 21년(1143)과 의종 13년, 24년에 지금의 전남지역의 경우 정안(장흥), 조양(보성), 해양(광주), 등지에 파견된다.
한편 예종 원년에 정안에 감무가 파견되는 기록이 "고려사"(권 13, 세가 예종 원년 4월 경인)에 보인다. 정안현은 현재의 장흥군 관산읍 중심의 고을로 "고려사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 장흥부조에 영암 임내였다가 장흥부로 승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영암에 속한 정안현에 감무가 파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국 23개 지역의 속현에 감무와 현령이 파견되고, 다시 명종대에 이르러서 전국적으로 대규모적인 감무가 파견되기에 이른다.
명종 2년(1172) 좌승지 이후의의 요청으로 50여 개 현에 감무가 파견 되는데, "고려사"세가, 명종 2년 6월 임술 이 시기의 감무 파견은 무인 집권층의 세력 기반 구축과 무인 집권이후 심화되고 있던 지방사회의 동요를 억제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후 동왕 5년과 6년에 전라도 16개 지역을 포함한 전국 63개 소에 감무관이 파견된다. 명종 2년(1172) 감무가 파견 될 당시 영암의 속군이던 도강군에도 감무가 파견되고 영암의 예하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는 16개 지역에서 감무관이 파견되고 있고, 영암군의 속군이던 도강군에도 감무관이 파견되었음이 나타난다. 도강군에 감무관이 파견된 것은 도강군이 이미 하나의 군.현 단위로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밝혔듯이 고려시대의 감무관 파견은 근본적으로 주현-속현체제의 모순 해결을 위한 것으로, 주현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받는 속현의 처지를 개선하여 유민의 발생을 억제코자 한 조치였다. 감무관의 파견은 속현에게 유리한 조치였으나, 동시에 감무관의 설치는 속현이 일정한 정도로 성장해 있어야만 했다. 즉, 공부,조세 등의 차역이나 수령에의 공궤등의 부담을 감당할만한 재정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종대부터 이루어진 감무의 파견은 유민의 발생과 이의 안집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나, 군.현 단위로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속현의 성장과 이러한 속현의 성장이라는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국가의 시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명종 2년(1172) 도강군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도강군을 독립시킨 영암군은 당시까지도 4개의 속현을 거느린 대군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후 고해현(해남 현산)과 죽산현(해남 마산)이 진도와 합쳐져 해진군으러 변화되는 과정에서 영암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황원(해남 화원)도 해남에 이속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조선초의 영암군은 고려시대의 넓은 영역을 분할 이속시키고 현재의 영암지역과 대체로 일치되는 관할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지방제도를 통해서 파견된 지방관과 지방향리지그 그리고 주민들의 동향은 어떠했을까, 이같은 문제에 대한 자료들은 거의 남아있지않아 살펴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편적이나마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해서 영암지역의 지방관, 지방향리직, 주민들에 대해서 검토해 볼 수 있다.
우선 지방관에 대해서는 1270년에 영암군수 김서에게 보낸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이 글은 지금의 강진 만덕산의 백련사 4대 주지였던 진정국사 천책(1206~?)이 용혈암에 거주하면서 보낸 내용이다. 제목은 "답영암군수 김낭중 서서"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부군수 호부낭중 김서에게 회답하는 글
뜻을 받들고 갑에 든 법화정 한 질을 보냈는데 연과 견 두분 수님이 드렷으리라 믿습니다. 매일 틈틈이 읽으시고, 읽기를 마치면 외울 수 있고, 외우기를 마치면 실행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경에서 모든 부처가 출현한 커다란 사업의 인연도 다른 목적이 아니고, 현재 짧은 시기의 생각과 벗어나지 않으므로 더욱 정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만약 갑속에 그대로 둔다면 도리어 흰 부분은 종이에 불과할 뿐이고 먹글씨의 부분은 먹일 분이니,애써서 외움이 잠자코 있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소승에서"세속에는 문자가 있지만 진리에는 문자가 없다"고 한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해탈에는 설명이 없으며 두루 원만한 높은 지혜는 탐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해능은 "불경이 무슨 잘못으로 너의 마음에 장애가 되는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종의는 "선승이 조사의 어록을 탐독하여 마지 않는 자가 적지 않으면서, 왜 부처의 말씀은 읽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부처의 말씀이란 12부의 경전을 말하니다. 지의는 관심송경법에서 "삼세의 모든 부처가 이를 따라서 출현하지 않았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조가 또한 "문자란 법신의 기운과 목숨이니, 만약 읽고 외워서 널리 통하면 번거로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옛 이포새는 불경을 항상 지니고 깨끗하게 살았던 이들을 전기로 모두 남겼으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지금 현실에서 예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병신년 겨울철에 평상시 이세제가 남방을 시찰하다가 몸소 백련사를 찾아서 결사에 이름을 걸고 참여하여 산승에게 28품을 짓도록 요청하고 순서를 바르게 유통시켰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참뜻에서 경전의 취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시팔교에 매진하면서 신심이 바로 생기고 외워 지켜지기를 발원하였습니다. 비록 맡은 일이 바쁘고 거의 겨를이 없어도 밤낮으로 부지런히 읽어서 비로소 첫째 권을 외운 뒤에 다시 서울로 들어갔습니다. 이미 산서에 자취를 남겼습니다만 언제 어디서나 매우 바빠서 편히 쉴 겨를이 없었으나 항상 음미하고 쉬지 않았습니다, 여러번 추위와 더위가 바뀌어 마침내 7관을 모두 마치고 지금은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매일 외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진실로 제가의 보살이십니다. 하물며 새기고 인쇄하여 천여부를 베풀면서 널리 좋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지금 좌우에는 젊은이가 호위하고, 해마다 다섯필의 말을 받는 지방관으로, 백리(고을)안이 옛날처럼 조용하고 정치가 간단하고 송사가 없었으며, 영재는 조용하고 뜰에는 새가 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불심을 찾지 않으면 어느 때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리겠습니까. 바라건대 깊이깊이 유념하십시오.
또한 산승의 저술을 찾으셨는데 제가 세속을 떠난지 이미 41년입니다. 오직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우러르면서 불법이 빛나기를 바라면서 저술과 글에서는 세상에서 널리 알려지지 못한 부처와 조사의 알맹이만을 주워 모았습니다. 오직 산가에서 찬송하고 읊을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하였을 뿐 세상의 흔한 문장을 섭렵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진 이래 여산의 혜원과 양나라의 부대사와 지공, 당나라의 한산습득과 방은 등은 모두 부처의 현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저작을 보건대 그 내용이 일상생활을 직접 설명하여 무생지역으로 인도하러 하므로 오늘날의 유장들이 마음과 입을 아름답게 꾸며서 기이하고 놀랄 만한 글귀를 짓는 경우와는 다릅니다. 제가 비록 처음에는 그런 일에 마음을 쓴 적이 있기도 합니다만 전하는 사람들이 잘못 편집하여 저의 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머리를 깍고 출가한 뒤에도 불법의 뿌리를 밝히지 못하고 세속의 문자만 남긴다면 악마이거나 불자가 아니며, 부처의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지은 결사문과 나머지 계송과 잡문은 부처의 유적을 기록했을 분이고, 그안에 인용한 불조의 묘전은 모름지기 내 자신이 서술한 것으로 다소의 깊은 뜻이 있으나 이것도 뵙고 대화와고자 합니다, 삼가 답합니다.
이 글은 진정국사 천책의 저서"호산록"의 송광사본에 실린 것으로 허홍식 교수의 저서 "진정국사와 호산록"(민족사 1995)에 실린 번역문을 전재한 것이다. 이 내용을 통하여 영암에 파견된 지방관 김서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 백련사의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관직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지방호족의 지방에 대한 통치조직을 살펴보자. 고려초기의 지방향리직은 당대등(호장)일대등(부호장)아래 호부, 병부, 창부 등을 두었고 호부의 경우 낭중. 원외낭. 집사 등의 관직으로 다스렸다.
영암지방에서는 이같은 호족세력의 지방민 통제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1986년 10월 복원공사중에 발견된 영암읍 용흥리의 상풍사지 5층석탑(보물 제1118호)의 탑지에 나타난 다음 기록이 참고가 된다.
菩薩戒弟子高麗國靈
嵒縣戶長朴文英特爲
邦家鼎盛朝野益安
敬造立五層石塔安
置聖風大寺永充
供養也
統和二十七年己酉六月日記
위 기록은 1009년(목종 12, 통화 27) 영암의 호장 박문영이 주도해 탑을 봉안함을 알려주는 기사로써 55개가 넘는 대규모 석탑을 건립하는데는 노동력과 경제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일종의 정치권력이 있어야함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호장이 지방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의 굴재양태는 어떠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 자료 역시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서호면 엄길리의 매향각기에 나타난 내용을 통해서 추론을 할 수 있다.
이 기문은 1344년(충목왕 4년)에 미타계란 민중신앙결사체가 주도하여 용화초존공양을 위한 매향의식을 행하고 그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미타계내천만인이라 하여 그 발원지가 수많은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사회에서 행해진 민간신앙을 알 수 있는 동시에 향촌 공동체 조직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사진출처:https://blog.naver.com/huhasim/222268922024
영암읍 용흥리 성풍사지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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