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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470회 작성일 22-05-02 11:03본문
고려시대의육상과 수상의 운송을 담당한 대표적인 교통체계는 역참과 조운창이었다. 고려의 역참제는 매우 발달되어 전국에 걸쳐 체계적인 도로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당시의 역참제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지방을 관할하기 위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제도였다. 역참제는 국가의 관용기관으로서 공문의 전달, 관물의 수송, 공무를 띤 출정관리의 왕래. 숙박 등에 편리를 주기 위하여 설치된 육상운수 교통망이었다.
역제에 대한 정비는 고려초기부터 시작되어 성종대에 이르러 22역도의 간선설치와 525개의 역이라는 방대한 조직이 완성되게 되는데, 영암지역이 포함되어 있는 전라ㅗ도 지역의 도와 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승나주도는 30변을 관장하였다. 청암(나주) 선암 경양(광주),덕기(담양)경신 청영 용계(무안)광리(남평)인물(능성)영신(진원)조림(철야)가림(화순)록사(영광)단암(장성)청송(무송)가풍(감풍)덕수(모평)영보(영암)통곡(도강)녹산(해남)벽산(수년)별진(죽산)남리(황원)군지(복성)가신(보성)파성(조양)낙신(낙안)익신 섬거(광양) 율양(승주)이었다.
승나주도는 현재의 전남지방에 해당하는 교통로로 30개 역이 속해있었다. 현재의 영암. 해남. 강진을 묶는 거대한 군이었던 당시 영암지역에 속해있던 역은 영보역. 통곡역. 녹산역. 별진역. 남리역 등으로 이들 역의 소재지와 관할 찰방은 다음과 같다.
* 영보역 : 영암군 북쪽 성밑(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소로역-청암도찰방
* 통곡역 : 동강현 병영성밑(강진군 병영면 성남리) 소로역-벽사도찰방
* 녹산역 : 해남현 남쪽 5리(해남군 해남읍 신안리) 소로역-벽사도찰방
* 별진역 : 해남현 북쪽 30리(해남군 계곡면 성진리) 소로역-벽사도찰방
* 남리역 : 해남현 서쪽 35리(해남군 황산면 남이리) 소로역 -벽사도찰방
위와 같이 나타나듯이 5개 역이 청암도찰방과 벽사도찰방에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청암도찰방은 현재의 나주시 청동엥 소재하고 있었으며, 벽사도찰방은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각 도의 찰방에는 종 6품의 찰방을 파견하였었다.
영암군이 관할하에 있던 5개 역은 어떻게 유지되고 운영되고 있었을까.
영보역 등 각 역에는 역마. 역사. 역졸. 역정 등을 두어 역로 정비와 출장관리의 역마 이용 편의 제공 등을 하였다. 또한 역에 소속된 가호를 역호라 하여 역의 모든 노역을 부담하게 하였고, 각 역에는 역전과 공수전. 세전. 장전 등을 두어 그 조세로서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역호에는 역민과 역사로 구분되어 진다. 역민은 노역의 직접 담당자로서 국명의 전달, 군사적 긴급 사항의 보고, 생산물의 운반과 같은 업무 이외에 역의 공수전조를 납부하였으며, 이왕 달리 역사는 비록 군. 현의 사와 구별되었지만 역민에 대한 "장"으로서 노역의 분배. 수취. 감독 등과 같은 일을 담당하였다.
역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는데 사용했던 공수전은 역의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는데, 공수전은 역민에 의해 경작되었고 역민은 조세, 공수전조를 납부하였다. 또 세전은 역의 행정사무에 필요한 종이와 같은 문방구를 위해 경작되어졌고, 장전은 역사, 즉 역장의 보수로서 역장의 생계를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역이 육상교통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해로를 이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거둔 조세와 공물을 선박에 의해 개경으로 운반하는것을 조운이라 하고 그 일을 담당하는 기관을 조창이라고 한다. 조창은 고려초기에 조세의 운송과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남도의 연해. 연강의 12주현에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 설치된 조창은 아래와 같다.
1. 흥원창(원주) 2. 덕흥창(충주) 3. 하양창(아주), 4. 영농창(부성) 5. 진정창(임피) 6. 여흥창(안보) 7. 부용(영광) 8. 해릉창(나주) 9. 장흥창(영암) 10. 해용창(승주) 11. 통양창(사주) 12. 석두창(합포)
이상의 12창이 설치되고 난 이후 서해도장연현에 안포창이 설치됨으로서 고려시대의 종운은 모두 13창이 되었다. 이 13창 가운데 지금의 전나지역에는 영광의 부용창(하무포, 현 법성면 법성리 남방 하천), 나주의 해릉창(치을포, 나주 금강 언덕), 영암의 장흥장, 승주의 해룡창(사비포, 순청 동천하구) 등 모두 4곳에 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이 지역의 토지가 종운을 통한 수송의 편리함때문에 중앙정부의 집중적인 탈점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암지역에는 신포(조선 성종 11년 조동포라 함, 현재의 해창리 동방 하천)에 장흥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영암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세곡을 운송하였던 장흥창은 영산강 지류에서 서해를 경유하여 개경의 경창으로 조운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장흥창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행정구획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영역과 주민, 치송와 지배기구 등을 갖고 있었다. 장흥창의 책임자는판관으로서 조세미의 수납과 보관, 조운을 맡아보았다. 그 밑에는 색곡이라 불리는 향리가 있었고, 색고은 조세 등을 거두어 들이옥 그것을 운송하여 개경의 경창에까지 입고시키는 실무를 맡아보는 장흥창의 실무책임자였다.
장흥창에는 이외에도 초공, 수수, 잡인 등 조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장흥창에는 조운을 해로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일정한 수의 조선과 조졸(초공 . 수수)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선 6척에 초마선 1선이 확보되어 있어천석을 적제할 수 있었다. 장흥창에 보관된 세곡은 조운이 시작된 2월부터 4개월이내에 경창에 운송을 완료해야만 했고, 유경가는 8석 운반에 운임으로 1석을 내었다.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는 연해의 농민들에게 비참한 생활을 강요해야만 했다. 연해의 백성들은 조새와 함께 수송비를 바쳐야 했으며, 경창까지 운송되는 동안 없어진 조세미까지 부담해야만 했다. 연해지역 농민들은 과다한 선세에 못이겨 산과 섬으로 도망하여 조운이 불통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기도 하였다. 이와함께 고려 말기에 심화되어가는 왜구의 침탈은 고려시대 조운제도의 기능을 크게 동요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폐해는 영암의 장흥창에도 미쳤던 것이다.
사진출처:https://blog.naver.com/ohyh45/20194890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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