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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1,472회 작성일 22-02-28 15:11본문
현종과 남해당 (시종면 옥야리 남해포)
서기 1010(고려 현종 원년)년에 고려의 친송책이 계속되자 강조의 난을 핑계삼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해 왔습니다. 고려는 분전했으나 워낙 수효가 많은 거란군에 밀려 패하고 말았습니다.
"전하, 서경으로 거란군이 몰려오고 있다 하옵니다. 어서 피신하옵소서."
"과인이 부덕한 탓이로구나. 선왕께 누를 끼치게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구려."
현종은 울먹이며 부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현종은 하는 수 없이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당시 나주 고을(현 시종면 옥야리 2구)의 남해포까지 피신하여 야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현종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백발의 수신이 나타났습니다.
"뭣들 하는 거요. 빨리 이 곳을 떠나시오. 어서요."
수신의 말에 짬짝 놀라 눈을 떠보니 조금 전까지 지척에서 출렁거리던 바닷물이 없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한밤중에 신하를 이끌고 몽탄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거란군 격전이 있었는데, 관군이 승리를 거두어 장수 하공진을 인질로 삼아 군사를 재정비하여 현종은 무사히 환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일 현종은 남해포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수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봐라, 남해포에 제각을 짓고 수신을 받들도록 해라. 남해포니까 남해당이라 하고 그 부근 현감들이 직접 제를 모시게 하라." 현종은 6개 고을, 즉 나주, 영암, 해남, 강진, 형광, 함평 등지의 현감들에게 제를 엄숙히 모시도록 명하고는 세자갓이라 불리우는 곳에 하마석을 세워 고을 책임자가 제를 모시러 말을 타고 오다 이 곳에서부터 내려 걸어서 남해당까지 오르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였습니다. 남해당 제실에서 불결하게 제를 모시게 되자 난데없이 대들보 위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고을 원님이 제를 모시던 중 급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방금 전까지 팔팔하시던 원님이 급사를 당하시다니."
"필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한 탓인 것 아니겠소."
"그런 것 같소이다."
이런 일들이 가끔 벌어지게 되자 원님들은 서로 제를 모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6개 고을 원님들로 하여금 3명씩 조를 편성, 1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제를 모시게 하고 각별한 주의와 정성을 다하라고 명했습니다. 고을 원님들이 남해당에서 제를 모실 때면 시종면 옥야리 마을 주민들은 밤이면 횃불을 켜들고 남해당 길을 환하게 밝혀주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각이 낡고 헐어서 마을에서 남해당을 파옥시키기로 하여 목수 30명을 동원하여 철거하려 하였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뇌성과 함께 비가 쏟아져 내리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 하며 철거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철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살펴보니 상량 밑에 씌여진 건물 지은 날짜와 철거날짜가 일치한 날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해당 건물은 50년 전에 이미 철거되고 현재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데, 밑바닥까지 드러난 갯벌과 함께 그 옛날 임금님이 피신했던 이야기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전하, 서경으로 거란군이 몰려오고 있다 하옵니다. 어서 피신하옵소서."
"과인이 부덕한 탓이로구나. 선왕께 누를 끼치게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구려."
현종은 울먹이며 부르르 몸을 떨었습니다. 현종은 하는 수 없이 신하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당시 나주 고을(현 시종면 옥야리 2구)의 남해포까지 피신하여 야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현종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백발의 수신이 나타났습니다.
"뭣들 하는 거요. 빨리 이 곳을 떠나시오. 어서요."
수신의 말에 짬짝 놀라 눈을 떠보니 조금 전까지 지척에서 출렁거리던 바닷물이 없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현종은 한밤중에 신하를 이끌고 몽탄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거란군 격전이 있었는데, 관군이 승리를 거두어 장수 하공진을 인질로 삼아 군사를 재정비하여 현종은 무사히 환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일 현종은 남해포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수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봐라, 남해포에 제각을 짓고 수신을 받들도록 해라. 남해포니까 남해당이라 하고 그 부근 현감들이 직접 제를 모시게 하라." 현종은 6개 고을, 즉 나주, 영암, 해남, 강진, 형광, 함평 등지의 현감들에게 제를 엄숙히 모시도록 명하고는 세자갓이라 불리우는 곳에 하마석을 세워 고을 책임자가 제를 모시러 말을 타고 오다 이 곳에서부터 내려 걸어서 남해당까지 오르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였습니다. 남해당 제실에서 불결하게 제를 모시게 되자 난데없이 대들보 위에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고을 원님이 제를 모시던 중 급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방금 전까지 팔팔하시던 원님이 급사를 당하시다니."
"필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한 탓인 것 아니겠소."
"그런 것 같소이다."
이런 일들이 가끔 벌어지게 되자 원님들은 서로 제를 모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6개 고을 원님들로 하여금 3명씩 조를 편성, 1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제를 모시게 하고 각별한 주의와 정성을 다하라고 명했습니다. 고을 원님들이 남해당에서 제를 모실 때면 시종면 옥야리 마을 주민들은 밤이면 횃불을 켜들고 남해당 길을 환하게 밝혀주곤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각이 낡고 헐어서 마을에서 남해당을 파옥시키기로 하여 목수 30명을 동원하여 철거하려 하였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뇌성과 함께 비가 쏟아져 내리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 하며 철거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철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살펴보니 상량 밑에 씌여진 건물 지은 날짜와 철거날짜가 일치한 날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해당 건물은 50년 전에 이미 철거되고 현재는 잡초만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데, 밑바닥까지 드러난 갯벌과 함께 그 옛날 임금님이 피신했던 이야기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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