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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1,762회 작성일 22-05-18 16:58본문
신라말 선조 계통의 스님으로 한국사상계예 커다란 획을 그었던 풍수지리설의 비조 도선국사는 흥덕왕2년(827) 영암의 구림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암에서 출생한 후 화엄을 거쳐 선승이 되어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전남 해안지방을 무대로 하여 살았다. 특히 광양의 옥룡사는 37세부터 입적할때까지 35년간이나 주석하였고, 이곳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도선국사는 대개 도참사상의 비조나 풍수지리설의 대가로만 알려지거나 후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선승이나 술사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도선국사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은 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과장된 후대의 문헌들을 비판없이 받아들인 결과에 기인한 것이었다. 도선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 본 장에서도 그에 의해 크게 선양된 풍수지리설과 그가 남긴 사상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겠다.
도선은 장보고가 영암의 인근 지역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기 한해전인 흥덕왕 2년(827) 영암의 구림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관해 기록된 '옥룡사도선비문'(1150,최유청찬)에 의하면 '속성은 김씨고 신라국 영암인이다. 그 세계와 조상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서 잃었다. 어떤 이는 태종대왕의 서손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여 도선이 태종무열왕의 계열임을 나타내고 있다.
도선국사가 태어날 무렵인 신라말기는 중앙 귀족층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그 과정에서 밀려난 진골출신들이 지방에 낙향하여 본관을 달리하면서 토착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즉 태종무열왕의 직계손만이 집권하게 되고 방계 귀족세력들은 도태되는 과정에서 지방으로 밀려난 일부 귀족층들이 집권 세력과 유리되면서 독자적인 친족공동체의 세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도선 또한 비록 영암에서 출생하였지만 속성이 김씨이고 태종무열왕의 시손이었다는 것은 그의 세계가 태종무열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더라도 중앙 진골귀족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중국과의 교통의 요지로서 문화적인 선진지역이었던 영암이라는 지리적 배경속에 도선국사계통의 친족집단이 토착세력을 형성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도선의 가문은 일찍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선비문"에 의하면 '그의 부모는 일찍이 독경과 염불에 뜻을 두었고 도선이 승려가 될 것을 일찍부터 예견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불교적인 가정 분위기속에서 성장한 도선은 그의 나이 15세 되던 해인 문성왕 3년(841) 월유산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이곳이 낙발처인데 옥룡사 비문(1150)에는 월유산 화엄사, 도갑사 도선국사비문(1653)에는 월남사, 도선국사실록(1743)에는 월암사라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최근 구례의 화엄사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불경을 공부한지 일년도 못되어 대의를 통달, 문수의 미요한 지혜와 보현의 그윽한 법문을 모두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문수와 보현은 모두 화엄종의 대표적인 보살로 도선은 신라 중기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인 화엄종에서 출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 되던 해인 문성왕 8년(846) 6년여의 화엄공부를 마친 도선은 화엄종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해설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나 문자를 거부하는 선종으로 개종하게 된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화엄종을 비롯한 중세 종교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었고, 전국 각처에서 역산선문을 비롯한 수많은 선문들이 개창되고 있었다. 도선은 영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곡성의 동리산을 찾아가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의 제자가 되어 4년간 선을 수업하게 된다. 도선이 스승으로 모신 혜철은 당나라에서 서당지장으로 부터 심인을 받고 귀국하여 곡성 동리산에서 새로 선문을 열고 있었다. 혜철의 스승인 서당지장은 마조도인의 수제자로 강서 홍주 개원사에서 선문을 열고 있던 사람이었고, 잉 개원사는 신라 선종의 성립에 관계가 깊은 사원이었다.
도선은 혜철에게 인가를 받은 후 스물세살되던 해에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운봉산과 태백산 등 약 15년간 전국의 명산대천을 수련하였다. 당시 선스으이 수행과정상 선사에게 인가를 받은 후 전국각처를 유람하고 탐방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추앙받게 되는 것도 이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도선비문'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도선이 옥룡사에 여러곳을 다니며 수행하던 시절에 지리산 구령을 지날때였다. 현실생활에서 숨어 수백세를 살았다고 자칭하는 '이인'이 나타나 남해강변에 오면 드릴 것이 있다고 말했다. 기이하게 여겨 그곳을 찾아갔더니 이인은 모래를 모아서 산천의 순역의 세를 가르쳐 주고 사라졌다. 이로부터 도선은 풍수지리를 깨닫게 되었고 더욱 음양오행설에 정진하였다"
이 구령은 지금의 문척면 오산 아래에 있는 사성암으로 추정되고 강변마을은 사도리라고 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도선은 옥룡사에서 주석하기전 전극을유람하며 선을 수행하면서, 풍수지리설의 이론과 실제를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전수받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전통적인 불교인 화엄종에 회의를 늒니 도선이 혜철에게서 동리산파의 사상을 전수받는 과정에서 풍수지리설 또한 습득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도선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선을 수행하는 한편 풍수지리설의 이론과 실제를 대조하면서 전국에 풍수지리설을 전파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 산천의 형세를 파악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인식이 결부되어 비보사탑설 등이 나오게 된 것 같다. 비보사탑설이란 전국의 쇠처나 역처에 절이나 탑 등을 세워 재난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러한 비보설은 전국적으로 크게 퍼져 풍수지리설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태조 왕건의 가문과 인연도 이때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을 유허하며 선을 수행하고 비보설을 전파하던 도선이 15년여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마지막 터전으로 삼아 주석한 곳은 광양군 백계산의 옥룡사였다. 이때가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로 그는 새로 옥룡산문을 개창하고, 이곳애서 72세(898)로 입적할때까지 35년간 머물면서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낸다. 광양 옥룡사에 대해서는 광양시와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도선이 태어나고 입적할 당시의 한반도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고대 신라사회의 붕괴로 후삼국의 융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도선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와 사상을 배경으로 태어났고, 그 영향속에서 성장했다. 더욱이 모든 사상의 융합을 강력히 추구했던 혜철선사의 제자였기에 도선 또한 비보사탑설을 주장하고 전파했으나 그것이 선의 뜻에는 미칠 수 없음을 밝혔고, 선의 이치를 구하는데 주력한 선승이었다.
격동의 혼란기에 전라도 영암땅에서 태어나 수많은 문도와 제자를 거느리며 선의 위치를 불교의 어느 신앙적인 사상보다 높게 평가했던 도선국사는 도참승 또는 신승이었다는 왜곡된 평가는 던져버리고 영암이 배출한 한국불교사에 빼놓을 수없는 고승으로 지칭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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