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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460회 작성일 22-05-2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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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진대사는 경문왕 9년(868) 영암 구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서 자라던 시기는 신라의 국운이 다해갈 무렵으로 후삼국이 삼국의 통일을 위해 치열한 쟁패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로 아버지 낭익과 어머니 박씨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허락으로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곧바로 천인산사에 나아가 머리를 깍았으며 학문을 닦다가 백계산으로 가서 도승화상(도선으로 추정)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18세에 화엄사 관단에서 구족계을 받고 스승에게 하직한 후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일정한 스승없이 배움에 힘썼다. 특히 성주산의 무량선사와 도굴산의 범일선사에게 선을 참구했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진성여왕 6년(892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무주소산의 광인선사에게 입실하여 심인을 전하여 받았다. 경명왕 5년(921년)30여 년 간의 수학을 마치고 고국땅에 돌아오니 당시 신라는 망해갈 무렵으로 호남지방은 이미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고, 강원도 철원에서는 왕건이 태봉의 왕 궁예를 멸하고 고려를 건국한 시기였다.

 그는 후백제 견훤의 배려로 전주 남복선원에머무르다가 곧이어 백계산 옥룡사로 돌아가게 되는데 당시까지 이 지역은 후백제 세력하에 있었다. 당시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대부분의 선증들이 고국땅에 돌아와서는 왕건과 연결되고 있는데 동진대사만이 유독 견훤의 세력과 연결되고 있었다. 후일 고려에서 왕사의 예유를 받는 생활을 하였지만 동진대사는 분명히 처음엔 견원편에 선 세력이었고 또한 도선국사가 옥룡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도선과 사제사이의 관계는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옛 스승 도선이 거처하였던 옥룡사에 거처를 정한 경보는 옥룡사 재건의 기틀을 닦는다. 도선국사 사후 퇴락할 수밖에 없었던 옥룡사는 경보가 주지로 있으면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한국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불리우던 도선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음에도 경보는 풍수지리설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문도들에게 새로운 선법을 퍼뜨리는데 도선에게서 전수받은 동리산문의 선법과 중국의 선종계 선법을 가미한 새로운 기풍의 선법을 펼쳤었다.

 동진대사가 왕건과 연결된 것은  후백제가 망한 936년 이후로, 당시의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 사원세력을 집요하게 포섭하고 있던 터로, 당에서 30년 간이나 수도를 하고 돌아온 대석덕인 동진대사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 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후백제가 망한 936년(태조 19년)대사의 나이 69세때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고, 왕사로서 고려왕실에 더움을 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2대 혜종과 3대 정종에게도 스승의 예우를 받으며 그의 만년생활을 하였다.

 정종 3년(948)4월 20일 세수80세로 옥룡사 상원에서 입적하니 법랍은 62세였다. 나라에서는 동진대사라 사호를 내리고 탑을 세워 그의 행적을 기리게 하니 탑호를 보운이라 했다.

영암 구림에서 태어나 도선의 사법제자로 자처하며 새로운 선법과 종풍을 펼쳤던 동진대사는 도선국사와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에 빼놓을 수 없는 대덕으로 일컫어지고 있다.


         옥룡사 동진대사보운탑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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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329600&cid=51293&categoryId=5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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