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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1,764회 작성일 22-05-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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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몽은 효공왕 11년(907) 영암의 구림에서 태어났다. 최지몽의 처음 이름은 총진으로 그의 부친 상흔은 원보의 벼슬을 지녔던 영암지역의 호족이었고, 최지몽은 호족이라는 유복한 가정 분위기속에서 일찍부터 학문을 연마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지몽은 어려서부터 배움을 즐겼다고 하며, 자라서는 대광현일을 스승으로 모시고 역사를 두루 설렵했다고 한다. 서남해안 해로의 요충지로 중국의 선진 학문을 일찍부터 수용했던 선진 문화 지역인 영암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지몽은 수도인 개경과는 상관없이 영암지역 자체내에서 성장한 지방문화를 배경으로 자라난 학자였던 것이다. 태조 7년(924)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왕건에게 발탁되었다. 역사와 천문. 복서 등 모든 학문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던 지몽은 태조 왕건의 꿈을 삼한통일의 길몽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총진이라 불리우던 그의 이름을 지몽으로 바꾸도록 하면서, 자신의 곁에 있도록 공태직을 제수하였다. 이후 최지몽은 항상 왕건의 곁을 떠나지 낳으면서, 태조의 고문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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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태조가 삼한통일을 이욱하는데 중추적인 역힐을 담당하였다.

 천문과 복서는 전시의 군사참모에게는 필수적인 지식이었다. 삼한통일을 위한 전쟁 당시 최지몽이 항상 태조의 좌우에서 떠나지 않고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지몽이 왕건의 군사직전에서 참모로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주며, 더불어 그는 대단한 지략을 갖춘 모사였을 것이다.

최지몽의 모사로서의 지략은 전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왕건의 사후 표출되었던 혼란스러운 왕위쟁탈전에에서 그의 재능은 또 한번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고려초기 호족연합정권 아래에서의 왕권은 취약하기 그지없었고, 이러한 배경속에 강력한 외척호족세력을 바탕으로 한 왕자들의 왕위 찬탈 음모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소위 친탈 음모를 미연에 방지케함으로써, 초기 고려왕조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먼저 혜종 2년(945) 그의 나이 39세 되던 해에 있었던 두 차례에 걸친 왕규의 반란 음모가 최지몽의 지모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왕규는 반란 모의가 실패한 것이 최지몽 때문이라 하여 칼을 뽑아든채 최지몽을 위협하영ㅆ다고 한다. 정종 즉위(945)후 최지몽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비.안마.은기 등을 상으로 받았다. 그는 74세 되던 경종 5년(980)에 다시 왕승의 반란 음모를 적발하였으며, 그 공로로 어의와 금대를 상으로 받았다. 이와 같은 내용들은 고려초기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지몽의 뒤어난 활약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들인 것이다.

 최지몽은 위와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한때 저계에서 숙청되는 등 불우한 시절을 맞기도 하였다. 광종 21년(970) 그의 나이 64세 되던 해에 왕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취하여 실예를 범하므로써 외방현으로 밀려났었다. 광종은 고려초기 왕권확립에 크게 기여한 왕이었다. 그는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호족세력을 주축으로 한 개국공신 계열을 숙청하고  중국으로의 귀화인과 새로운 군소호족 세력들을 중용하는데, 이와 같은 정치적인 배경속에서 초지몽도 밀려났던 것이다.

 최지몽이 다시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11년 만인 그의 나이 74세 되던해(경종 5년, 980)였다. 경종의 죽위 후 광종대에 중용되었던 새로운 세력의 숙청과 개국공신계열의 재등장이라는 대세 속에서 최지몽도 다시 정계에 나오게 되었다. 경종에 의해 소환된 최지몽은 대광. 내의령. 동래군후로서 식읍 1,000호의 주국이 되었으며, 은기 및 비단 이부자리와 휘장 그리고 의복, 말, 복두, 서대 등을 하사받았다. 그 이듬해(경종 6년, 981년) 왕승의 역모를 적발하였고, 76세 되던 성종 원년(982)에 좌집정. 수내사령. 상주국의 수상으로서 홍문종숭화치리공신의 호를 받았다.

 그 후 성종 3년(984) 78세의 노령을 이유로 치사을 신청하기 세번이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고, 조호 참가를 면제받는 특별조치와 함께 내사방에서 계속 집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성종대에 고려 정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최지몽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최지몽은 성종 6년(987) 81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사후 태자태전에 추증되었으며, 민휴의 익호를 받았고, 성종 13년(994) 경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최지몽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고 전해오나 아들들에 관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으며, 그밖에 최지몽의 후손으로 고려시대에 활동의 흔적을 남긴 인물은 없다. 그의 가계는 최지몽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위축을 면치못하였고, 이후 고려의 정치무대에서 사라져간 것으로 보인다.

 최지몽은 유교적 도덕에 근본을 둔 유학자 관료로 평가받고 있는데, 최승로. 최량. 이몽유. 김심신 등과 더불어 성종의 정치이념을뒷받침해주고 그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고려의 정치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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