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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1,319회 작성일 22-05-2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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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는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체택되어 크게 발달되었다. 유학은 일찍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왔지만, 현실 생활에 있어서 불교에 비해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후 '훈요십조' 등에서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하였고, 또한 그의 주위에 경사에 능통하고 학문에 능력있는 유학자들을국정에 참여시켰다. 영암 출신 최지몽과 최광윤, 박유 등이 그들로 이들 학자들은 왕건에게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운영을 권하였고 태조도 이를 따르고 있었다. 태조는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동 13년(930) 서경에 학교을 세웠고, 이 때문에 태조는 '현량한 이를 등용하고 유도를 중시한, 군주로 평가받았다. 유학은 이미 고려태조때부터 정치적 지도 이념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광종 9년(958)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유학은 큰 발전을 하였고, 성종은 정치의 사상체계로 성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더불어 지배 계층인 귀족들이 문신들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유학을 숭상하는 풍조는 더하여야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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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유학은 성종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였고, 귀족정치의 전성기인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융성하였다. 특히 해동공자라 호칭되던 최충은 9제학당을 세우니 9제학당은 사학의 효시가 되었다. 이를 본보기로 당시의 학자 11명도 각기 학교를 열었으므로 그들을 이른바 12종라고 칭하였다. 12종의 창설자는 대부분이 전직 고관으로 과거의 지공거(과학고시관)를 역임하였던 사람이 많았으므로, 당시 귀족 자제들은 관학인 국자감 보다는 사학 12종에 입학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관학인 국자감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에 새로이 관학의 진흥을 꾀하는 일련의 시책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숙동대에 7종 전문강좌 설치와 인종대의 경사 6학의 제도를 정한 것이 그것이었다. 더불어 인종은 각 주현에 향학을 세워 관학을 정비하였다.

 고려의 지방교육을 담당한 기관은 향교였다. 향교의 설치는 인종 5년(1127)으로 되어있다. 향교에는 명륜당과 문묘가 갖추어져 있어 교육기능과 공자와 선현들을 제사지내는 봉사기능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향교는 인종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보급. 완비되기에 이른데 영암의 향교도 이때 설치되었을 것이다. 문헌에 전하는 영암향교의 창설은 1420(세종 2)에 조령과 향내유림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전하나 고려시대에도 영암지역에 향교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영암향교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사항은 밝힐 수 없고, 초창 당시의 향교 위치는 당시 영보역이 있던 역리의 괴성개(혹은 역리와 망호리 사이)였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그곳에서는 많은 기와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한편 향교 영암지역에도 서재는 건립되었을 것이고, 서재는 영암 유생들의 구학의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고려의 유학은 인종대까지 진흥이 절정기를 이루었으나 무신난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기에 이른다. 당시의 침체된유학은 성리학이 고려에 전래되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고, 이른바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고려후기의 유학은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로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용되었던 것이다. 성리학은 고려말에 군신의 의를 강조하고 명분론을 내세워 이단의 배척에 나서게 되는데, 불교의 비본연적. 비현실적 사공와 행위를 공격하였다. 성리학자들의 척불론은 정도전(?~1398)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게 되고, 이들의 척불운동은 유불교체의 계기가 되면서 고려의 멸망과 조선왕종의 개창이라는 변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최지몽과 같은 대유학자를 배출한 영암지역에서도 유학은 번성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영암지역 호족들 사이에는 과거를 통한 신분 상승을 위해서도 유학은 장려되었을 것을 생각되며, 월출산 자락에 분포하고 있는 융성한 불교 문화와 함께 영암군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유학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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