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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1,871회 작성일 22-05-2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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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불교 국가라 할 만큼 불교적 성격이 강한 국가영ㅆ다. 숭불정책은 태조 왕건의 통치 이념중의 하나로 자리잡았던 만큼, 종교. 사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등 현실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의 불교는 건국초 부터 국왕의 옹호와 성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이것은 불교가 국가나 개인의 현재 생활에 행복과 이익을 준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고려 왕실은 국가를 비보하고 국이민복을 가져다 주는 불교를 옹호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고려의 불교는 현세구복적이며 호국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초기의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분립되어 있었고, 종순내에서도 대립이 일어나는 복잡하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태조 왕건은 선승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암 출신 선승으로 왕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은 도선과 경보였다. '고려사' 권수의 "고려세계"에 의하면 도선이 왕건의 아버지 용건을 찾아가그 집터를 잡아주고,왕건의 출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이 내용이 비록 사실적인 관점가의 선승을 이용하여 고령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또한 후삼국 통일후 후백제 지역 주민들을 수습할 필요성을 느꼈던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결합되어 있던 경보에게 후백제 지역의 백성들을 위무케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당시의 선승들은 태조에게 귀부해 온 호족의 지방에서 불교적 교화나 민심의 수습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더불어 도선이나 경보는 고려초기에 영암지역의 불교 사상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태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그의 후손들에게도 불교를 신봉토록 하였다. 태조는 10훈요의 제1조에서 "우리 국가의 대업은 필연코 제불의 호위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의 사원을 세워 주지를 보내 분수케 하고 각기 그 업을 닦게 하라"고 하여 그 자손들에게 불교국가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제2조에서는 사원 창건의 남설을 금지하였고, 제 6조에서는 연등회와 팔관회에 불사를 잘 지켜 거행하라고 하였다. 이후 연등회와 팔관회는 전국적으로 시행되어 일반화된 풍속이 되었다.

앞에서 밝혔듯이 고려초기 이래의 불교계는 분파의 대립, 새로운 종파의 개창이라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과 9출선문의 선종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들 양대 종파는 광종대에 이르러서 서로 융합하려는 교선일치의 사상이 나타나게 된다. 즉 교종과 선종 내부의 분열을 교종은 교종대로, 선종은 선종대로 각각 통합한 뒤, 다시 선. 교의 대립을 극복함으로써 전체 불교계의 통합을 꾀하였던 것이다. 먼저 교종의 경우는 화엄종 북악파의 균여를 후원해서 통합을 이루는 한편 선종은 당시 중국에서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흡수하려는 사상체계로서 나타난 법안종을 수입하여 이를 중심으로 각 지방의 선문들을 정리하였다. 이로써 고려중기의 불교는 법상종과 화엄종이 양립하는 체계가 되었다. 이 두 종파의 분열은 단순히 교리상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정치세력과의 분열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개경 중심의 귀족 불교가 종파간에 대립하고 있던 시기에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그러나 천태종은 귀족 불교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다라서 의천이 죽자 천태종은 곧바로 와해되었다.

 1170년에 일어난 무신난은 고려잔기의 문벌귀족 체제를 무너뜨렸고, 불교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닥쳐왔다. 불교계의 변화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지방에서의 불교 개혁적인 신앙결사의 유행이었다. 신앙결사는 개경중심의 귀족적인, 체계유지적인 타락한 불교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후깅의 댚적인 불교개혁운동은 조계종의 수선결사와 천태종의 백련결사였다. 수선사는 순천 송광사를 중심도량으로 한 정혜결사였으며, 백련사는 강진 만덕사를 근본도량으로한 법화결사였다. 수선사와 백련사는 전라도의 남부지방인 순천. 강진에서 당시의 세속적인 불교를 질타하면서 불자의 본래적인 면목을 되찾으려는 불교개혁의 가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개혁운동은 영암과 인접하고 있거나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서 일어난 신앙결사였다. 따라서 신앙결사운동이 일어났던 고려후기 불교계의 동향이 천태종의 미사인 도갑사나 영암지역의 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이상으로 고려시대에 전개되어 가는불교의 발전과 폐해를 영아지역과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영암지역 불교문화의 보고인 월출산 주변의 유물. 유적을 개관하여 봄으로써 고려시대에 영암지역에 흐르던 불교사상과 불교문화를 살펴보자.

 현재 영암지역에서 가장 주목되는 사찰은 도갑사이다.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월출산 도갑사에 도선이 거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도갑ㅈ사는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창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난 현재 도갑사에는 도선국사의 유물이나 당시로 추측할 만한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어 기록 자체를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도갑사는 고려시대에 이미 사찰로서 그 면모를 갖추고 있었고, 영암지역의 불교사상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것으로 생각된다.

 영암잊역에 산재하고 있는 불교 유적들 역시 고려시대 초기를 상한하진 않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영암지역의 불교문화가 고려시대 이전에는 유입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첫째는 영암 구림에서 확인된 정원명석비는 주목되는 금석문이다. 이 비는 1988년에 서구림리 해안쪽의 비석거리에서 발견되었는데 총높이 128cm로 40여 자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정원 2년 즉 통일신라 원성왕 2년(786)으로 전남 최고의 금석문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판독되지 않으나 일부내용에서 '합향', 향장'등의 내용이 있어 불교와 연관되지 않은가 싶다. 다음으로는 도선국사 (827~898)와 같은 대덕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비록 영암지역에 통일신라시대로 올라가는 유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이미 영암지역 일대에는 도서국사와 같은 대덕이 출생할 만한 불교문화의 수용태세가 무르익어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아울러 통일신라말에 태어나 신라가 고려에 패망하는 과정과 후백제의 기병을 눈앞에 보면서 일새을 마쳤던 도선국사와, 신라의 국운이 다해갈 무렵 태어나 고려 왕조에 도움을 준 동진대사 경보는 영암 출신으로 고려왕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영암지역이 고려시대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불교문화가 성숙되어 있었고, 영암의 기충 민중들 사이에도 붉료는 정신계의 지도이념으로서 자리하고 있었음을 입증 해준은 내용일 것이다.

 고려시대에 조성(건립)된 불교유적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마애불인 월출산 천황봉 아래의 마애여레좌상(국보 제144호)이 있고 성풍사지 3층석탑(보물 제1118호)은 영암읍 용흥리에 소재하는데 통화 27년이라는 연호를 알려주는 탐지가 확인되어 이 시기 탑파의 절대 편년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월출산 남쪽에는 월남사지 석탑(보물 298호)과 진각국사 혜심의 석비(보물 313호) 그리고 무위사 3층석탑(도문화재 자료 제76호)과 선각대사 편광탑비(보물 507호) 등이 대표적이다.(이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미술. 공예편 참조)특히 월남사와 무위사가 있는 월남동과 무위동은 조선 초기까지도 영암의 월경처였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이 기록으로 미루어 영암과의 관련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진출처 :https://blog.daum.net/choews119/15851768(월남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2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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