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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암문화원 댓글 0건 조회 2,337회 작성일 22-03-0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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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최덕지(崔德之)를 그린 조선시대 초상화 원본과 그 초본.
보물 제594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74㎝, 가로 53㎝. 『연촌유사(烟村遺事)』에 의하면 최덕지 영정은 원래 3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1본은 생전에 그린 진상(眞像)으로서 존양루(存養樓) 옛터 근방 영당(影堂)에 봉안되었다. 나머지 2본 중 1본은 녹동서원(鹿洞書院)에, 1본은 주암사(舟巖祠)에 봉안되었다. 현재는 원본, 이모본(移模本) 및 유지본(油紙本)이 전라남도 전주 최씨 문중에 보존되어오고 있다. 그 중 원본과 유지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본의 작품상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화폭은 가운데에서 연결된 연폭(連幅)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의 연폭 형식은 대부분이 3폭이다. 그래서 얼굴 부분이 들어가는 중폭(中幅)이 가장 크며, 양 옆으로 두 개의 소폭이 결봉되는 방식인 데 비하여 이 최덕지 초상의 연폭 형식은 특이하다.
인물의 복장으로 인하여 이 초상화가 더욱 주목된다. 모자는 감투형에서 평량자형(平凉子型)주 01)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최덕지가 생존하였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한 형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입제(笠制)는 발립(鈸笠)주 02)의 형태이며, 포제(袍制)는 일색복(一色服)으로서 고려 말로부터 전승되어 온 원나라의 영향이 조선 초까지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최덕지 초상의 차림새는 여말선초 선비의 한거(閒居)하는 모습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에 나타난 얼굴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이 초상은 최덕지 만년기의 모습이다. 안면 및 옷주름 처리에서 실물에 핍진(逼眞)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발립은 반투명으로 안의 상투 부분이 검게 비치고 있으며, 안색은 전반적으로 갈색계의 색조를 띠고 있다. 눈썹은 담묵으로 칠한 위에 그 털은 한 올 한 올 표현되었다.
짙은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작은 눈매에서는 생기있는 명상적 눈빛을 보여 준다. 그러나 회화사적인 흥미를 끄는 것은 비화법(鼻畵法)이다. 최덕지의 코 형태는 주먹코이다. 조선 초기 초상화의 대부분이 8, 9분면의 취세에도 코를 거의 옆모습으로 나타냈다. 이에 비해서 이 초상화에서 코 처리는 사상에 바탕을 둔 시각적 진실을 보여준다.
안면 처리를 세밀히 살펴보면, 이른바 법령(法令)주 03) 및 뺨에 고심세(高深勢)주 04)가 표현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 부위에는 안색보다 짙은 갈색으로 음영 처리가 되어 있고, 원공[귀의 원문(圓文)] 역시 그러하다. 바로 이 점이 개채(改彩)를 의심하게 한다.
『연촌유사』에 의하여 이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초상화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 나주 묘산(墓山)에 묻었다가 왜구가 물러가고 수년 후 파보니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개장의 필요가 있었던 듯 『연촌유사』에는 ‘화상개장찬문(畵像改粧贊文)’이 수록되어 있다. 1610년(광해군 2) 4월에 개장하여 덕진교(德津橋)로 옮긴 것이 1635년(인조 13) 2월이라 한다. 그 간의 시일이 오래 경과된 사유가 분명하지 않으나, 개장 후 초상화를 종손가에 모신 사실이 확인된다. 개장 때 개채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 개채로 인하여 원본이 손상되기보다 오히려 취(趣)가 더욱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 화상은 안면 및 시선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몸체는 정면을 향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오른쪽 어깨와 팔이 정면에 맞도록 돌려져 있다. 이 점이 인물의 표현상 대칭성에서 벗어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표현적 특색으로 변질된 면도 있다. 발 부분이 표현되지 않고 손이 나와 있는 점은 그 후의 조선시대 초상화와는 다른 특징이다. 역시 고려시대 초상화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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