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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동행 댓글 0건 조회 2,530회 작성일 22-05-0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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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무인 정권이 타도되고 원종 11년(1270) 5월 개경환도가 결정되자 이에 복종치 않은 삼별초의 강도에서 난을 일으킨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별초는 무인집권자인 최우에 의해 조사된 일종의 경찰기관인 야별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에 이들의 수가 증가하자 좌.우별초로 나누고 몽고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반몽고적 성향이 짙은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합한 것이었다. 이들 삼별초는 초기에 다분히 사병적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었으나, 최씨무신정권이 최의의 죽음으로 인해 붕괴되면서 개경환도 문제를 둘러싼 무신 계열과 원종 중심의 문신들이 반목을 보이면서 삼별초 봉기의 씨앗이 싹트게 되었다. 즉 이들의 대립은 출륙문제에 찬성하는 문신들과 이를 몽고에 대한 굴복으로 보는 무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나타났다.

당시 삼별초는 항몽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와의 오랜 전투 경험을 통하여 강렬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결국 몽고에 대한 항복이 잦아 예속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곧 대몽항쟁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삼별초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조치이기도 하였다. 몽고에 대한 고려의 예속은 항목전쟁을 주도한 삼별초의 기득권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었고, 더구나 삼별초의 명단이 국왕측에 압수된 상태는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만약 삼별초의 명부가 몽고군에 넘겨질 경우 삼별초에 대한 보복적인 처단은 충분히 예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속에 원종을 비롯한 측근의 문신들에 의해 개경환도가 결정되고 그 일시까지 공고되자 삼별초의 반응은 더욱 민감하였다. 이같은 삼별초의 동태를 직감한 원종과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1270년 5월 27일 비빈과 조정백관이 개경으로 원종을 맞아들임으로써 개경으로의 환도는 결정되었다.

 결국 삼별초는 강한 반발을 보이게 되고 동년 29일 조정은 장군 김지저를 강도에 보내어 불응하는 삼별초를 폐지시키고 삼별초의 명부를 몽고군에게 넘겨주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르자 삼별초는 원종 11년(1270) 6월 배중손과 노영희 등을 주축으로 반개경정부 . 반몽고의 노선을 표방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설치, 관리임명 등 체제를 정비한 후 장기적인 대몽항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천여척의 선단에 강화도에 살던 그들의 가족과 공. 사노비 재물까지 싣고서 진동에 도착한 삼별초는 진도를 거점으로 삼아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전라도 연안과 섬은 물론이요, 경상도 연해지역까지 삼별총의 세력권 안에 들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삼별초가 진도에 응거핱 3개월후, 원종 11년(1270) 11월에 탐라(제주도)를 함락시킨다. 제주도는 남방 해상교통의 요충지로서,  송이나 왜와의 교통의 요로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러한 지정학적 여건을 중시하여 삼별초는 제주도를 공략하였던 것이다. 개경정부에서도 삼별초의 제주도 공략의지를 미리 알아차리고 영암부사 김수와 장군 고여림 등을 보내어 지키게 했지만 삼별초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궤멸당하고 말았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 정부는 커다란 해상왕국을 건설하는데, 삼별초가 그들의 근거지로 진도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자연적으로 천연의 요새였고, 둘째 비교적 규모가 큰 섬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였고, 셋째 우리나라의 전투형태는 대부분 수성전으로 만약 육지의 성을 거점으로 할 경우 고립이라는  우려가 있어 자체 방어의 면에 있어서는 진도와 같이 물자가 풍부한 섬이 여러가지로 유리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서남해안의 바닷길은 신라시대 이전부터 대당. 대일 무역과 고대문화 이동의 루트임과 함께 국가의 세금을 이송하는 조운로상의 주요한 길목이었다는 점이다.

 진도에서 삼별초는 용창성을 쌓고 궁전을 세우며 그 세력을 뻗쳐 남해. 창선. 거제. 제주 등 30여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육지에도 세력을 뻗쳐 육지의 물자를 진도로 옮겨 항전의 태세를 굳게 하고 장흥. 거제. 제두 등 30여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하였다. 육지에도 세력을 뻗쳐 육지의 물자를 진도로 옮겨 항전의 태세를 굳게 하고 장흥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등 연해의 요지를 비롯하여 나주. 전주까지도 공격을 가하여 위세를 떨쳤다.

 한편 당시 영암을 비롯한 전라도의 사정은 어떠하였을까. 원종 11년 9월 전라도 토적사 참지정사 신사전과 전주 부사 이빈은 각각 나주와 전주에서 삼별초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달아나 버렸고, 나주부사 박부는 저항과 투항을 주저하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라도에서 가장 큰 고을인 나주와 전주의 수령들이나 삼별초를 토벌하러 온 사령관이 그 지경이었으니 다른 고을들의 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군이 풍문을 듣고 맞이하여 항복하였으며, 혹은 진도에 가서 알현하였다.'는 기록은 당시 전라도의 사칭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진도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영암지역 또한 삼별초의 영향권에 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당시 개경정부의 재정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던 전라도 지역의 공부와 경상도 지역의 조운 통로마저 삼별초군이 장악하게 되자, 개경정부의 재정상태는 극도로 궁핍할 수 밖에 없었고 진도의 탈환은 시급을 요하는 문제였다.

삼별초 정부에 대한 수차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개경정부와 몽고는 전함을 대량으로 건조하는 등 무기와 군사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특히 이들은 병액의 증가를 위해서 경군과 추청, 경상 등 지의 장정을 징발하고 문. 무. 산적. 백정. 잡섹과 승도까지 징집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모든 전투력을 총집결하여 진도 공략을 감행하였다.

고려군 사령관 김방경과 몽고군 사령관 혼도는 중군을 거느리고 벽파정으로, 몽고군 장수 홍다구 등이 이끄는 좌군은 노루목쪽으로, 대장군 김석과 몽고군 장수 고을마가 이끄는 우군은 군직구미쪽으로 협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삼별초 정부는 방비와 대책을 소홀히 한데다 몽고군이 사용하는 화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진도는 함락되고, 삼별초 정부의 왕 승화후 온과 배중손은 피살되었다. 김통정의 지휘를 받는 삼별초군의 일부가 제주도에 들어가 저항을 계속하였고, 서남해안 일대에 세력을 뻗쳐 회령, 탐진, 낙안, 등 전남 해안 일대를 공략하였다.

 그러나 제주의 삼별초 정부는 1273년(원종 14) 김방경과 혼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기에 이르고, 이로써 1270년 6월 이래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 등지로 옮겨가면서 약 3년 동안 계속되었던 삼별초의 항쟁도 종언을 고하였던 것이다.

 제주 삼별초 정부의 함락은 고종 18년(1231)최초의 몽고 침략으로부터 약 40년 간의 대봉항쟁에 막을 내린 것이었으나, 삼별초의 항쟁정신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사진출처:https://blog.naver.com/fliibwtsnay/4020793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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